오늘(9월 21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다. 주임 신부님께선 오늘이 한국 천주교의 명절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두 분을 비롯한 위대한 선각자들이 계셨기에 이 땅에 가톨릭이 뿌리를 내렸을뿐더러 이 나라 사람들이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에 그렇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정말 잔인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생명에 위해를 가한다. 종교박해의 광풍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선한 이들을 참혹한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 단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답동천주교역사관에만 가도 그 무도한 만행에 쓰인 흉기들이 아직도 살기를 내뿜으며 전시돼 있다.
하지만 그런 죽음마저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다. 아니 그들은 그 앞에서 오히려 더 강고해진 믿음으로 운명을 담대히 받아들였으며 간절한 기도로 가공할 공포를 거두어 냈다. 결코 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물다섯의 사제(김대건 안드레아)도, 같은 이유로 아버지를 여윈 아들(정하상 바오로)도 가혹한 운명 앞에서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다. 가장 당당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소설가 김영하는 그걸 “인간 정신의 불가해한 영역”이라 표현했다.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굳게 믿기만 한다면 그 어떤 잔혹한 고통이라도 견딜 수 있다”고도 했다(‘단 하나의 삶’ 중). 그 약속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구원에 관한 말씀일 터, 하지만 그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불가해’하다고만 하는 것도 너무 막연하다. 설득력이 없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단 하나, 죽음마저 두려워 않고 당신을 따르는 것. 누구나 그리하고 싶지만 아무나 그러지는 못한다.
지난해 암 선고를 받았다. 그 소릴 듣자마자 든 생각은 이렇게 죽는구나였다. 방탕했던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그다음은 어머니였다. 남편 먼저 보내고 아들 하나를 가슴에 묻은 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을 여는 대수술까지 받으신 팔순 노인이다. 나는 하나 남은 혈육으로 그분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7년째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런 처지에 나까지 당신에 앞서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적어도 당신 먼저 보내드린 후 그 뒤를 따르는 게 옳다. 그래서 나는 아직 죽을 수 없다고, 더 살아서 그를 돌봐야 한다고 항변했다. 그렇게 울며 소리치며 기도했다. 물론 그건 그냥 더 살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게 두렵고 그렇게 죽기 억울해 어머니를 앞세워 벌인 유치한 인질극에 불과했다.
사람은 그렇게 제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나 보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갖은 핑계를 만들어 대는 게 우리의 본성인 모양이다. 만약 내 바람대로 어머니께서 평화로이 영면에 드시면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오히려 감사하게 죽음을 받아들일까. 아닐 터다. 전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구실을 찾아 목숨을 구걸할 게 뻔하다.
예수님 말씀 중 ‘제 십자가’라는 대목을 되뇌어 본다. 누구의 권고나 강요도 없는 오롯이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판단과 선택이다. 위대한 순교자들께선 그렇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청해 예수님을 따르셨다. 날 선 칼도, 앞선 이의 참혹한 죽음도 예수님께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을 믿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로마 8. 35-39 참조).
나같이 불충한 자에게 그런 순교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경지다. 다만 나는 내가 조금만 더 의연해졌으면 좋겠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건 저절로 오지 않을 것이다. 제발 그리되기를, 그리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벼름질할 일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