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재영이

그가 그리 버텨준 이유

by 이앙꼬

재영이는 키가 큽니다. 180도 훨씬 넘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야 보통일지 몰라도 우리 땐 큰 키였습니다. 뒤에서 1, 2번을 다퉜습니다. 그 큰 키처럼 그는 상위 1%가 되고싶어 했습니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럴 능력도 있었습니다. 반듯한 자세에 무엇보다 공부를 잘했습니다. 상당히 치밀하고 집요한 구석도 있었습니다.


정신력도 좋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담담하고 침착했습니다. 지레 겁먹지도 않았고 걱정을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위기에서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호들갑스레 남의 도움부터 청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제힘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담대’라는 표현은 그에게 참 잘 어울립니다. 그런 그의 품성을 설명하는 몇 가지 장면이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고2 끝 무렵 그는 돌연 자퇴서를 던집니다. 대학 진학률, 특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몇 명을 보내느냐가 학교의 평판을 가르는 시대였습니다. 상위권 학생 하나가 제발로 걸아나가겠다니 학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선생님들이 나서서 극구 말렸지만 그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에 들어갔습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그는 삼성전자에 입사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최고의 기업이었습니다. 연봉이 우선 좋았습니다. 6급 공무원 월급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을 때, 삼전은 대졸 초봉이 150만 원쯤 됐습니다. 능력과 실적에 따른 공정한 평가제도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인재경영에 있어선 가전업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기업의 표준이었습니다.


재영이가 삼전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이제 그가 꽃길만 걸을 줄 알았습니다. 그 자신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인천의 영업본부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전제품은 주로 방문판매에 의존했습니다. 판매사원들은 대부분 4~50대 가정주부들이었습니다. 그네들을 관리하는 일이 재영이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업무는 둘째 치고 자존심의 문제였습니다. 재영이처럼 1류 학교를 나와 1류 회사에 취업했는데 겨우 현장에서 영업사원들 실적이나 관리하는 게 마뜩찮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거나 하려고 그 고생 했나, 하는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게 들기 십상입니다. 실제 그 위기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재영이는 담대히 버텼고 다 이겨냈습니다.


다음은 베트남 시장 개척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관광지로 친숙하고 교역 대상국으로서의 지위도 확고하지만 당시만 해도 베트남은 적성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과 함께 월남을 도운 대한민국을 그 나라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습니다. 혈혈단신이던 그는 신변마저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잘 해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입니다.


그는 청상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늦둥이 막내는 어머니께 큰 자랑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도 지극한 효성으로 보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장성한 아이들은 사회에서도 당당히 제 몫을 다합니다. 평소 과묵한 그도 아이들 이야기엔 조금 신을 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다 보시고 10여 년 전 영면에 드셨습니다.


그런 그가 그만 병에 들었습니다. 그걸 알았을 땐 이미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습니다. “엄마가 부르셔.”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 2년 동안 가족들은 조금씩 이별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남은 가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버텨준 것입니다.


영정 속 그에게서 요셉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신 침묵의 성인(마태 1, 18-25 참조)이십니다. 재영이도 온몸으로 제 운명을 해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런 불평도, 어떤 엄살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재영이스럽게 살다 갔습니다. 그가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척'하며 살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