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며 살기- 2

'재의 수요일'에 바치는 기도

by 이앙꼬

재의 수요일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창세 3.19 참조)대로 우린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만드신 인간이 지은 원죄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대가입니다. 그날 우리는 특별히 더 간절한 심정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그날로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데다가 탐욕에 찬 인간들로 인해 예수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인간들의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는 그런 예수님의 거룩한 걸음을 함께 되새기는 시간입니다.


40일의 사순기간 중 우리는 한층 더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신앙을 공고히 합니다. 금욕하고 단식합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 그것의 교훈을 되새기며 절제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자선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스스로를 성찰합니다.


그날 미사의 복음말씀은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6절, 16절부터 18절까지, 예수님께서 기도와 자선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와 방법을 몸소 일러주시는 대목입니다. 남을 위한 일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홀로 골방에 들어가 하되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굳이 말을 하려 들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반대로 행하는 이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그들은 자신의 자선을 온 사방에 떠벌이는가 하면 굳이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선 채 기도합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구하려 듭니다. 그건 그저 유치한 자기 과시이며 허영의 고백에 다름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지 몰라도 돌아서면 손가락질 합니다.

평소 같으면 그저 듣던 말씀이 그날따라 불편하고 불안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가슴이 뜨끔뜨끔했고, 종내에는 식은땀까지 나는 듯했습니다. 불현 듯 어머니가 떠올라 그랬습니다. 그즈음 저는 또 어머니와 크게 한바탕하고 서로 냉전 중이었습니다. 병약한 팔순 노모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는 또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발단은 지극히 사소한,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조용히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같으면 어머니께서 먼저 자리를 피하셨을 텐데 이번엔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역정은 내셨다는 게 문제입니다. 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높여 억울한 심정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제가 놀라 고개를 돌리고 말 정도였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어머니 얘기를 입에 올리며 당신을 모시네, 어쩌네 했습니다. 큰 수술을 받은 노모와 단둘이 사는 환갑의 아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만으로도 제법 그럴싸해 보였을 터입니다. 그런 제게 효자라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저는 ‘에이 아닙니다’하면서도 은근히 좋아라했습니다. 굳이 더 부인하거나 실체를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척’만 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당신 말에 순종하고 뭐든 다 해주는 척, 그래서 효자인 척. 그건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자꾸 그렇게 ‘척’하다 보면 제 생각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행동이 바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 척은 그런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기꾼이거나 위선자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의는 아니었다지만 결국 모두를 속이고 저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천하의 불효자에 웬 몹쓸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 위선의 죄가 위중합니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와의 시간은 점점 더 줄고만 있으니 어서 제게 벌을 내리시길, 이 가증스런 위선의 가면부터 벗겨 주시길, 모든 것을 깨끗이 다 태우고 오직 재만 남게 하길, 그 재를 뒤집어 쓰고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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