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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재 Jun 13. 2017

코미 전 FBI국장과 여성 성폭력 피해자의 ‘동병상련’

“왜 해고된 뒤 이야기하나” 

“아마 내가 더 강한 사람이었더라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을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놀라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성폭행을 당할 때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저항능력이 마비되는 이른바 ‘긴장성 부동화’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성폭력에 면죄부를 줘선 안 되는 중요한 근거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피해자의 주장을 의심하는 경우가 흔하다. 

제임스 코미 전 미 연방수사국 국장이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 Chip Somodevilla/게티이미지코리아

이 글의 맨 앞에 있는 인용문은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 그것도 권력의 핵심부라 할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지낸 제임스 코미가 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한 증언의 일부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증언한 코미 전 국장의 처지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미국 내에서 제기됐다. 

뉴욕타임스는 코미의 청문회가 열린 8일(현지시간) 오피니언면에 “여성들은 코미에게 우리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고 말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뉴욕타임스에서 젠더 이슈를 보도하는 수전 카이라 기자의 글이다.

칼럼의 시작 부분은 이렇다.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와 왜 단 둘이 한 방에 있었느냐로 공개적으로 추궁을 당한다. 왜 상관이 요구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사임하지 않았는가. 부적절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상관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계속 받았는가. 왜 앞에 나와 상관이 요구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것 같지 않은가?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성만 바꾸면 성희롱 사건에서 많은 여성들이 경험한 것과 같다.”

코미 전 국장은 청문회에서 상관인 트럼프 대통령을 독대하는 것을 꺼려했고 매우 불편하게 느꼈다고 증언했다. 코미 전 국장의 키는 203㎝로 미 프로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와 같다. 거구의 남성이지만 “내가 더 강했다면”이라며 권력 앞에서 위축된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했다. 성폭력과 같은 강압적 행동에 직면했을 때 놀란 나머지 저항하지 못하고 나중에 왜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는지 피해자들이 자책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책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재판 과정에서는 “‘정상적’인 피해자라면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할 텐데 왜 그렇지 않았느냐, 모순된다”라는 식의 피고인 측 변호인의 추궁에 답해야 한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안드레아 콘스탄드가 재판 이틀째인 지난 7일 증언대에 섰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코스비의 변호인은 콘스탄드가 그 이후에도 코스비와 계속 만난 것은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고 주장했다. 

직장 내의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은 종종 권력관계의 불균형에서 발생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여성이 남성의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직장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코미와 트럼프 사이에 벌어진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트위터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자유기고가인 다니엘 캄포아모르는 “성폭력과 성희롱의 피해자들은 코미가 ‘너무나 충격을 받아 트럼프에게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트위터 이용자 로라 R 피셔는 코미 증언에서 압박과 괴로움, 불안과 같은 성희롱 피해와의 유사성을 느껴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트위터 이용자 에디 스펜서는 “코미는 거의 7피트에 가까운 키에 여섯 아이들의 아버지이지만 그의 증언은 거의 성희롱 (피해자)의 증언과 같다”라고 말했다. 

부적절하다고 느꼈을 때 즉시 항의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과 비슷한 입장의 발언들도 나왔다. 트럼프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9일 트위터에 “만약 코미가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트럼프와 다시는 독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왜 계속 그의 전화를 받았냐”라고 물었다. 트럼프 지지자인 토니 클링거는 “코미가 해고당한 이후에 트럼프가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자가 해고당한 이후에 성희롱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칼럼에서 “오늘의 청문회는 권력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당황하게 만들고 침묵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라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또한 성희롱과 성폭력 사건은 종종 신빙성과 공정성, 편견의 문제를 낳는다면서 적어도 이번 코미 청문회 증언으로 남성들도 여성들이 감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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