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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재 Jun 09. 2017

‘6일 전쟁’ 50주년···점령과 해방의 엇갈린 기억

이스라엘은 땅과 함께 물도 지배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게 ‘6일 전쟁’만큼 극명하게 명암이 갈리는 기억은 없다. 제3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리는 ‘6일 전쟁’이 5일로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단 6일 동안 이어진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지배 영토를 3배 이상 늘렸다. 이스라엘에게 이 날은 축제일이지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에게는 치욕과 애도의 날이다. 한쪽은 ‘점령’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다른 쪽은 ‘해방’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며 아랍 민족주의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스라엘에 영토를 빼앗긴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과의 적대관계는 확고해졌다. 6일 전쟁은 팔레스타인 영토인 요르단 강 서안 점령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중동 분쟁의 뿌리가 됐다. 

한 이스라엘 군인이 6일 전쟁 동안 수에즈 운하 인근의 한 정유소에서 치솟는 화염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Photo by Central Press/Getty Images/이매진스


■선제공격으로 압도적 승리 거둔 이스라엘

이집트는 1967년 5월 아카바 만과 홍해 사이에 있는 티란 해협을 봉쇄하면서 이스라엘 에일라트 항구로의 접근로를 막았다. 앞서 이집트는 이전 10년 간 비무장지대로 있던 시나이 반도를 재점령해 그곳에 배치돼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에 철수를 요구했다. 당시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런 조치는 아랍 세계의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나세르의 반 이스라엘 행보는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해 이집트 주도하에 아랍을 통일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나세르의 반 이스라엘 조치는 말에 그친 경우가 많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실제적인 위협으로 봤다.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이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는 이집트의 이런 위협 때문에 전쟁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군은 5일 새벽 아랍 연맹 중 최대 군사국인 이집트에 기습 폭격을 가했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에 이집트 군은 450여 대의 항공기 중 300여 대를 잃었다. 이스라엘 군은 동시에 요르단, 시리아 등의 비행장들을 공습해 약 100대의 전투기들을 파괴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첫날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고 이에 힘입어 지상전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이스라엘은 6일 동안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영토에 동시에 진격해 2만 700㎢에 불과하던 영토를 순식간에 6만 8600㎢로 늘렸다. 골란고원을 지키던 시리아 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아랍 연맹은 기선을 제압당한 채 지리멸렬한 전투를 이어가다 결국 10일 오후 휴전 협정 체결에 동의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압도적이었다. 이스라엘의 인명 피해가 800명 정도에 불과했던 반면 아랍 국가들의 희생자 수는 2만 명에 달했다.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 출처:르몽드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 출처:르몽드

6일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에게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심리적 측면에서 큰 변곡점이 됐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요르단 강 서안(위 지도에서 Cisjordanie·영문명은 West Bank) 지역과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장악했다. 골란고원 일부와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강제 병합됐고 요르단 강 서안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가자지구는 50년째 이스라엘 군에 봉쇄돼 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 군병력과 검문소를 배치해 이 일대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이집트 공군 기지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고 있다. Photo by GPO via Getty Images/이매진스
6일 전쟁 동안 포로로 잡힌 이집트 군인들이 이스라엘 군의 명령에 따라 손을 머리 위에 들고 있다. Photo by Terry Fincher/Getty Images/이매진스
1967년 6월13일 6일 전쟁 동안 패주한 시리아 군이 남겨 놓은 탱크를 이스라엘 군인들이 살펴보고 있다. Photo by Express/Express/Getty Images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 군이 이집트 군을 공격하기 위해 시나이 사막으로 진격하고 있다. Photo by Keystone/Getty Images/이매진스
이스라엘의 센추리온 탱크 부대가 6일 전쟁 당시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Photo by Three Lions/Getty Images/이매진스
여단장으로 6일 전쟁에 참여했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가 1967년 6월8일 시나이 사막에서 망원경으로 전방을 관측하고 있다. Photo by Yossi Greenberg

■‘화약고’가 된 예루살렘

이스라엘 군은 한편 동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 전체를 장악했다. 구시가지인 동예루살렘 점령은 당시 정부에서 확실한 지침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것으로 유명한 모셰 다얀 당시 국방부 장관과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이 이 점령 작전을 주도했다. 6일 전쟁 10년 후 이스라엘 총리에 오른 메나헴 베긴 당시 보수정당 리쿠드 연합의 합동 의장도 예루살렘 점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동예루살렘 점령에 따른 국제사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정복’ 대신 ‘해방’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린 계속해서 ‘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군사적 관점에서 올바른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동예루살렘에 있어서는 ‘해방됐다’라고 말할 것이다. 논란이 될 경우 우린 다윗의 도시인 이곳 동예루살렘이 무장 세력의 손아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 앞에 있던 아랍인들의 거주지를 철거했다. 당시 600명의 아랍인들이 이곳을 떠나야 했다. 

1967년 이스라엘 국방장관 모셰 다얀(가운데)이 6월 6일전쟁 중 예루살렘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by Stan Meagher/Getty Images/이매진스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에 큰 걸림돌이 됐다. 당시 이스라엘의 외무장관 아바 에반은 이를 정확히 예견했다. 온건파인 에반 장관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위해 점령 영토를 반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해 6월 15일 각료회의에서 예루살렘을 ‘화약고’로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다. 하나는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유대 역사에서 이곳이 갖는 특별한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두 종류의 시민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을 방어하기란 어렵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의 강제 분할을 승인한 1949년 11월29일 미국 뉴욕에서 당시 이스라엘의 초대 유엔주재 대사를 지낸 아바 에반(오른쪽 두번째)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현재 예루살렘의 인구는 88만 3000명이다. 이중 유대인이 55만 2000명, 팔레스타인인이 33만 1000명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지만 거주증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액수의 세금을 낸다. 거주증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기 위해 필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영토인 요르단 강 서안은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이후 A, B, C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A구역은 팔레스타인이 행정과 군사에서 전적으로 자치를 누리는 지역이다.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들이 이 구역에 속해있다. B구역은 행정은 팔레스타인이 담당하나 치안은 이스라엘이 행하는 지역이다. C구역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구역이다. 요르단 강 서안 영토의 61%가 여기 속한다. 

이스라엘은 또한 C구역 곳곳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정착촌은 올해 기준으로 131개로 이스라엘은 이곳에 모두 38만 6000명의 이스라엘 주민을 이주시켰다. 이스라엘 국민의 4%이자, 요르단 강 서안 인구의 13%이다. 정착촌이 모여있는 아리엘 지구에는 주민들을 위한 대학까지 세웠다. 정착촌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동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국제법상 점령은 합법적인 영토 획득 방법이 아니며 따라서 이곳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 행위이다. 정착촌 철거는 양국의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지만 정착촌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3가지 종류로 나눠 관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군사와 행정에서 완전한 자치를 누리는 지역은 고작 18%에 불과하다.

 ■영토 점령은 곧 물을 지배하는 것

이스라엘은 6일 전쟁으로 점령한 땅들을 전략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점령지에서의 지배력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후 비옥한 땅인 요르단 강 계곡을 따라 이전 군사 기지들을 정착촌으로 바꿨다. 이스라엘은 발달한 물관리 능력을 활용해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들을 재배했다. 오늘날 이 강을 따라 생산되는 작물의 85%가 정착촌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수와 농업용수를 풍부하게 이용하는 반면, 땅 주인이라 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물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서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 지역 정착촌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평균 369ℓ의 물을 쓰고 그 외 지역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평균 300ℓ의 물을 사용한다. 반면,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평균 물 사용량은 73ℓ에 불과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1인당 일평균 물 사용량은 100ℓ이다. 한국의 일평균 물 사용량은 2015년 기준 282ℓ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물을 사용하려면 이스라엘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할당량을 받아야 한다. 물을 이용할 수 없어 농업을 비롯한 산업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연히 일자리도 부족하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이스라엘이나 인근 아랍 국가들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 팔레스타인을 고사시키는 셈이다. 그러나 약탈적인 정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적대감과 지역의 불안정을 키우는 요소이다.  

빨간 실선은 팔레스타인 영토인 요르단 강 서안으로 녹색 지역은 이스라엘이 점령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요르단 강 계곡이다. 출처:르몽드

■‘두 국가 해법’ 거부하는 이스라엘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회복을 위해 양국 존재를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도 겉으론 이를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영토 내 점령지에 정착촌 건설을 지속하는 등 실제 행동에서는 늘 반대였다.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며 올해 1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도 이스라엘은 불참했다. 팔레스타인도 불참했지만 ‘두 국가 해법’과 파리평화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 회복의 걸림돌로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국가 해법’ 대신 이스라엘 중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 밝혀 팔레스타인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대사관을 텔아비브에 유지하며 이스라엘이 자국 수도로 간주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등장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목소리는 더 강경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의회 신문에 “성전산(Temple Mount :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성지로 이슬람인들은 이곳을 고귀한 성역이라는 뜻의 Noble Sanctuary로 부른다)과 통곡의 벽은 영원히 이스라엘 주권 하에 있을 것이다. 50년 전 우리 군인들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얻어낸 역사적 부정의의 수정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월12일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이후 분쟁의 땅으로 변했다. Chris McGrath

6일 전쟁 50주년 기간인 8일에는 보란듯이 새롭게 1500채의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 새로 지어지는 주택 중 102채는 새 정착촌인 아미하이에 들어선다. 인권단체 피스나우에 따르면 아미하이는 이스라엘이 1992년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그 설치를 승인한 정착촌이다. AFP통신은 6일 전쟁 5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이같은 결정을 내려졌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이번 결정을 포함해 6월 중으로 2500채의 주택 건설을 승인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자국 법으로도 불법인 정착촌을 사후 승인하는 주택이 포함됐다. 피스나우는 “수천 채의 주택 건설 승인은 이스라엘이 두 국가 해법에 이르기 위한 협상에 나설 의지와 선의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6일 전쟁으로 시작된 50년간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톰 세게브는 “6일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나지 않았다”며 “그 전쟁 7일째는 지난 50년간 지속해 왔다. 그 전쟁은 우리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매일, 매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말했다. 



※제3차 중동전쟁 등 이-팔 분쟁 일지

    ▲1947.11 = 유엔, 영국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이스라엘)-아랍인(팔레스타인)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 체제에 두는 결의안 채택… 이스라엘은 수용, 아랍권은 거부

    ▲1948.5.15 = 이스라엘 건국…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1차 중동전 발발, 양측 휴전 성사 후 가자지구는 이집트, 요르단강 서안 지역은 요르단 관할이 됨

    ▲1964.1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출범

    ▲1967.5 = 시리아,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맺은 이집트가 시나이반도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이스라엘 홍해 상 관문인 아카바만으로 이어지는 티란 해협을 봉쇄하자 이스라엘군 전쟁준비 돌입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발발>

    ▲1967.6.5 = 이스라엘 공군,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라크에 선제공격… 적 항공기 약 400대 파괴

    ▲     6.7 = 이스라엘, 요르단령 예루살렘 구시가지(동예루살렘)와 서안 장악… 요르단 휴전 수용

    ▲     6.8 = 이스라엘, 이집트 시나이반도 점령 완료… 이집트 휴전 수용

    ▲     6.9 = 이스라엘, 시리아군이 포격 거점으로 활용해 온 골란고원 장악 

    ▲     6.10 = 시리아 휴전 수용…6일간 전쟁으로 이스라엘군 679명 사망, 2천563명 부상… 아랍 연합군 2만 1000 명 사망, 4만 5000여 명 부상

    ▲1967.11.22 = 유엔 안보리, 242호 결의안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지 불인정, 이스라엘군 철수 촉구… 이스라엘은 거부

    ▲1973 = 이집트, 시리아의 선제공격으로 4차 중동전(욤 키푸르 전쟁) 발발

    ▲1978 = 이스라엘-이집트 시나이반도 반환과 팔레스타인의 제한적 자치허용을 골자로 한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

    ▲1982 =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PLO 본부 튀니지로 이전

    ▲1987 = 제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인 민중봉기) 발발…1993년까지  팔레스타인인 1천여 명 사망

    ▲1988 = PLO, 1947년 유엔 결의안에 따른 ‘두 국가 해법’ 수용

    ▲1993.9 =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서안 일부 정착촌 철수와 팔레스타인의 잠정 자치 등을 인정

    ▲1995.9 = 오슬로 Ⅱ 평화협정 체결(요르단강 서안 관할권 세분화 등 명시)

    ▲1995.11 = 오슬로 평화협상 주역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극우 유대인에 피살

    ▲1996~99 = 팔레스타인 자살공격 격화

    ▲2000.9 = 제2차 인티파다… 이스라엘 리쿠드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 방문에 팔레스타인인들 격분

    ▲2004.11 =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망

    ▲2005.9 = 이스라엘, 가자 정착촌·주둔 병력 철수… 이스라엘의 38년 가자 점령 종식

    ▲2006.1 =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총선에서 압승

    ▲2006.6 = 하마스, 가자지구 장악

    ▲2011.9 = 팔레스타인, 유엔 안보리에 회원국 지위 격상 신청했으나 부결

    ▲2012.11 = 팔레스타인, 유엔 비회원 옵서버 국가 자격 획득

    ▲2012.12 = 이스라엘-하마스 8일 교전 발발

    ▲2014.7 = 이스라엘-하마스 50일 교전 발발

    ▲2014년~현재 =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와 미국 주도 협상 계획 실패 등으로 이-팔 직접 협상 교착 상태  



※참고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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