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 패션 키즈가 아니었습니다

by designwalkers

얼마 전 일본 고베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곤 10여 년 넘게 거의 매달 주기적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동대문 도매 매장을 운영할 때부터 해오던 루틴으로, 처음에는 일본의 상품들을 둘러보는 시장조사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저 습관처럼 다녀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겪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미 오래전 큰 변화의 시기를 거친 일본은 별다른 변화 없이 늘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몇 년 전부턴 패션 숍, 캐주얼한 식당, 마트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케이팝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젊은이들로 가득 찬 곳에선 종종 "대박", "맛있어"라는 한국어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게 요즘입니다.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인 제게 가장 크게 와닿는 변화는 단연 한국 브랜드들의 일본 진출입니다. 일본 스트릿 브랜드에 열광하고 국내 브랜드에는 특별한 팬층조차 없었던 2000년대 초반, 제가 일을 시작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이 여전히 어색하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저는 패션 키즈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이 애니메이션과를 졸업한 저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심슨(The Simpsons)》, 《파워퍼프걸(The Powerpuff Girls)》, 《스펀지밥(SpongeBob SquarePants)》 등 미국 유명 애니메이션의 하청을 맡던 회사였고, 저는 카메라실 보조 스태프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환경은 모르지만 그때의 애니메이션 회사는 기본급 50만 원에 주 2회의 야간, 주 1회의 철야 근무를 밥 먹듯이 하며 힘겨운 노동 강도와 박봉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군대식 기업 문화와, 꿈 많은 '애니 키즈'였던 제게 지워진 '하청 업무'의 굴레였습니다. 창작 활동의 설렘보다는 남의 그림을 찍어내는 반복된 노동이 저를 지치게 했습니다.


결국 회사를 퇴사하고 자본금을 모아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프로덕트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장사'로 이어졌고, 그렇게 옷가게 판매 스탭이란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저 사회를 너무 몰랐던 치기 어린 반발심 같은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더 넓은 곳에서 애니메이션 공부를 더 해보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던 중 2000년대 초반 정말 우연히 '멀티숍'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셀렉트 숍'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서 Nike, Adidas, Puma 같은 신발과 Stussy, Levi's, Bape 등을 수입해 판매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게 되고, 남의 것만 판매하는 것에 조금씩 불만이 쌓여갈 때쯤이었습니다. 수입한 브랜드들을 보며 "우리도 우리 옷을 만들어보자"라며 스태프들과 의기투합하게 되었죠. 제대로 된 디자이너나 전문 지식의 준비도 없이 급하게 만든 몇몇 아이템이 놀랍게도 당일 품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인지도도 올라가고 매장의 규모도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옷들이었음에도, 당시 셀렉트 숍에서 자체 브랜드를 출시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에 그 신선한 접근 덕에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자체 브랜드는 결국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준비나 실력 없이 시작한 상품들은 금세 시장에서 외면받게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장의 흐름 역시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많은 부채를 남기고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 후 부채를 갚고 생계를 잇기 위해 빈티지 매장을 거쳐 여성복 매장을 지나, 동대문 도매 매장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본격적으로'지, 도매 매장을 오픈할 당시에도 무작정 덤벼든 탓에 옷을 만들 실력은 여전히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신상 전쟁터라 불리는 살벌한 도매 상가에서 제가 내밀 수 있는 카드라곤 억지로 짜낸 반팔 그래픽 티셔츠 10종이 전부였으니까요. 자본도 실력도 없이 덤벼들었으니, 그 시작이 얼마나 어설펐을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10종의 반팔 티셔츠는 맨투맨, 후드, 팬츠, 데님, 니트 등으로 하나하나 늘어갔습니다. 아이템을 넓혀가며 치열하게 매달렸던 10여 년간의 도매 매장 운영은, 코로나를 겪으며 밤낮이 바뀐 삶에 대한 회의 끝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저는 패션 키즈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우연히 옷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 우연들이 쌓여, 지금은 쇼핑몰의 자체 제작 상품이나 브랜드의 제품 생산을 대행하는 프로모션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옷 만드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과연 그때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있기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의 글은 바로 그런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들이 정석적인 매뉴얼은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기반으로, 옷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최소한의 길라잡이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