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EIGHT 에피소드 5
W 업체와 함께 일을 하게 된 후부터는 늘어난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일이 즐겁다는 마음에 매일 아침 신나는 기분이 계속되었다.
W 업체의 요구는 좋은 원단과 부자재를 사용해 상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덧붙여, 당시 그들이 동대문 밤시장에서 사입하는 기존 품목들과 스타일 면이나 퀄리티 면에서 이질감 없는 상품으로 밸런스를 맞춰 주길 바랐다.
나는 '잘하는 디자이너'라고 당당히 말하기엔 실력이 부족한, 그저 싸게 잘 만드는 걸 최고로 치는 '고인 물' 디자이너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싸게 잘 만들지도 못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해 여러 해 이 일을 해오며 몸소 느끼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닐 터다. 그렇다 해도 좋은 원단에 완성도 높은 옷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이 상황이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오래된 거래처인 A 업체의 주문은 꾸준한 매출을 유지해 주었지만, 낮은 단가의 원단만 사용해야 했고 최대한 공정을 줄여 납품 단가를 낮춰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욕구를 억눌러야 했기에, A 업체와의 일은 매출이라는 숫자는 채워줄지언정 디자이너로서의 갈증을 채워 주진 못했다.
여기서 잠깐, 자체 제작 상품이라는 게 사실 조금은 모호한 개념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해 '자체 제작'이라 함은 판매 업체에서 인하우스로 디자인하고 생산까지 도맡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업체가 중간에 껴서 진행한다면, 유통 단계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니 오히려 옷 가격이 비싸지는 건 아닐까?
물론 해외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거대 업체들에 잣대를 둔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겠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자.
우리 같은 프로모션 업체들은 동대문 도매 매장에서 직접 판매하면서 들어가는 임대료, 인건비 등의 지출이 없기에 오히려 더 낮은 단가로 공급할 수 있다.
일반 소비자들은 모르는 영역이겠지만, 1평에서 2평 사이즈의 매장 임대료는 상가마다 다르고, 또 몇 층인지 어느 위치인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운영이 잘 되는 상가 기준으로 적게는 200만 원에서 1,000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으며, 인건비만 해도 기본적으로 디자이너 한 명, 매장 직원 한 명은 써야 한다.
간혹 디자인, 생산, 매장 업무 등 모든 일을 홀로 초인적인 의지로 해내는 오너들도 있긴 하다. 나도 시작하고 몇 해 동안은 따로 디자이너를 두지 않고 H와 둘이서 모든 일을 해왔었다.
동대문 상권에 관한 깊은 이야기는 추후에 하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나 같은 디자이너가 원단 시장에 나간다는 건, 단순히 특정 원단 하나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단 으레 해야 하는 '루틴'으로 봐야 한다. 직접 세어 본 적은 없지만, 동대문 종합시장의 원단 매장만 3,000개 전후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각 매장별로 수십 개의 원단을 소개하고 있으니, 그곳에 얼마나 많은 원단이 존재할지는 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장 구조는 A, B, C, D 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별도로 작은 신관도 있다), 부자재, 원사, 홈웨어 용품 등을 판매하는 지하 1층과 부자재 전문 매장이 주를 이루는 1층, 그리고 본격적으로 원단을 취급하는 2층,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예전엔 4층에도 원단 매장이 다수였다). 층별로 빼곡히 들어선 1~2평 남짓한 매장들은, 처음 이곳에 와본다면 마치 거대한 미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 많은 매장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신상을 내놓고 있으니, 나름 성실한 편인 내겐 당연한 루틴이다.
좌우에 늘어선 원단 매장들의 스왓치 진열대를 쉴 새 없이 눈으로 훑으며 넓은 원단 시장을 돌다 보면, 잠깐 사이에 봉투 하나가 만들어진다. 매일 같은 루틴이라고 해도 매일 다른 날인 양, 챙기는 스왓치가 매번 다른 게 보통이지만 가끔은 어제 가져온 것과 동일한 걸 또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마음에 든 것이다.
스왓치를 수거하다 보면, 쓰고 싶지만 단가가 비싸거나 시즌에 맞지 않는 스왓치는 따로 보관하고, 때론 특정 옷을 만들면 좋겠다 싶어 따로 스크랩북을 만들어 놓기도 하는데, W 업체와의 첫 미팅에 만들어 간 체크 셔츠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40수 고밀도 코튼 소재의 마드라스 계열 체크무늬로, 우디(Woody)한 컬러감이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느낌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컬러 베리에이션 덕분에 진작부터 눈에 넣어둔 원단이었다.
SS 상품이니 두께 면에서도 문제 될 게 없었고, 컬러감도 계절과 잘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단가가 꽤 있는 원단이다 보니 소위 '싼마이'(괴랄한 단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많이 사용한다) 매장에서 쓰기는 어려울 테니, 여러모로 괜찮을 듯싶었다.
4월에 활용하기 좋은 캐주얼한 스타일을 생각했기에, 슬림하거나 스탠더드 한 핏보다는 간절기 재킷 대용으로 걸쳐 입기 좋은 '보이핏' 스타일로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 원단의 컬러들도 미리 둘러보았던 W 업체 쇼핑몰의 판매 제품과도 매칭이 잘 될 듯했다.
솔리드 컬러가 아닌 개성이 뚜렷한 원단을 사용할 때는 흔히 말하는 '요시랭이'를 추가하기보단 밑단을 일자로 할지 아니면 굴릴지, 포켓을 넣는다면 어떤 모양으로 할지 등 정도로만 디테일을 최소한으로 하는 게 단가 면에선 유리하다. 첫 미팅인 걸 감안해서 가격 경쟁력에서도 점수를 따야 한다는 생각에, 좋은 원단을 사용하되 공임은 줄이기로 하고 만든 샘플이었다.
두 번째 미팅 때 핏을 수정하고, 그 후 컨펌용 샘플을 제작해 QC를 보고 발주가 진행되었다. 별문제 없이 출고되고 리오더 발주도 받으며 다른 상품들도 추가로 진행하게 되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옷 자체가 괜찮았다기보단 '이 정도면 일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일해 보기로 했구나, 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