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영화 <트랜짓>
영화 언론사 '씨네리와인드'에 발행된 글입니다.
<트랜짓>은 선형적인 일정한 시간 속에서 진행되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건드리고 있다. 화면 속 풍경은 현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과거 2차 세계대전 때가 떠오르는 ‘파시스트’, ‘대공습’, ‘점령’이 존재한다. 군인경찰에게 쫓겨 도피하는 난민들은 <트랜짓>의 주요 인물들이다.
이렇게 배경으로 특정한 시대를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사회상을 바라보게끔 한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때 난민을 대거 발생시킨 나치즘과 현재 유럽의 난민 사태를 자연스럽게 아우르며 미래에 난민 문제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다.
독일의 난민인 게오르그는 작가 바이든에게 아내 마리의 편지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를 전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바이든을 찾아간 게오르그는 그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오르그는 마르세유로 떠나 멕시코 대사관에 바이든의 짐을 맡기러 갔다가 바이든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따라서 미국으로 떠날 기회를 쉽게 얻고 마리와도 가까워지게 되며 그의 암울한 삶에도 희망이 보이는 듯 하다.
<트랜짓>의 난민들이 머무르는 곳은 친구의 집, 호텔, 애인의 숙소 등 일시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이들은 그곳에서조차 편히 쉴 수 없다. 안식을 취해야 할 공간에서도 또 다른 난민의 고통을 발견한다. 이런 이들은 화면 속에서 계속 걷고 있다. 카메라는 이들의 발걸음을 포착하고 따라간다. 이들이 그렇게 걸어서 도착하는 곳들은 모두 최종 도착지가 아닌 경유지일 뿐이다. 끝내 뱅뱅 맴돌기만 하는 것 같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은 결국 떠날 기회가 주어져도 그 기회를 잡는 듯 마는 듯 방황하고 만다. 주인공 게오르그가 겪는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사랑을 오래 이어갈 수도 없다. 난민이라는 신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장애물로 작용한다. 계속 어딘가로 도피해야 하는 난민은 머무르던 곳과의 이별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불가피하다.
결국 최종 목적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이 계속 걷기만을 반복하는 방황, 그리고 그 어떠한 것으로도 난민의 신분을 바꿀 수 없는 비극을 특수한 시간성과 몽환적인 플롯으로 나타낸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 누가 더 빨리 상대를 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노래도 위로도 없다.”라고 분명히 대답하는 <트랜짓>은 관객이 난민의 입장을 고스란히 목격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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