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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은비 Mar 24. 2021

폭력으로 점철된 운동선수들의 일상

* 이 글은 일 년 단위로 발행되는 모교 교지 50호(2020년)에 실은 기사입니다. 최종 탈고는 2020년 10월 30일에 하였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올해도 국내 스포츠계에서 자행된 폭력이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2020년 6월 26일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의 고(故) 최숙현 선수(이하 고 최 선수)가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고 최 선수는 어머니에게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메시지를 유언으로 남겼다. 최 선수는 2016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지난 소속팀이었던 경주시청의 김 감독과, 운동처방사 안 씨, 주장 장 선수 등에게 성희롱, 폭행, 폭언 등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안 씨는 치료를 빙자하여 가슴과 허벅지 등을 만지는 성추행을 일삼았고, 김 감독은 쇠파이프로 머리를 때리거나 청소기를 집어던지는 등의 폭행을 상습적으로 저질렀다. 


  2018년 국내 미투 운동을 시작으로 2019년에 국내 스포츠계 곳곳에서 여러 성추문이 잇달아 폭로되었다. 정부와 관련 기관들이 나서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피해 사례는 올해도 계속 드러났다. 이러한 악습의 고리가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채 올해 이렇게 또 한 번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스포츠계 폭력이 다시 한 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19년 성추문 폭로의 시작은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이하 심 선수)였다. 여러 국제 무대에서 메달리스트로 좋은 활약을 보여 온 심 선수가 밝힌 피해 사실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019년 1월 8일, 심 선수는 조재범 전 코치(이하 조 전 코치)에게 당한 성폭행 피해를 추가로 폭로했다. 당시 조 전 코치는 심 선수를 포함한 4명의 선수를 상습 폭행한 혐의로 2018년 1월에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이미 복역 중이었다. 조 전 코치는 과거 평창올림픽 직전에 심 선수를 가혹하게 폭행했고 그 여파로 심 선수는 뇌진탕 증세를 보여 올림픽 무대에서 의식을 잃고 넘어지기도 했다. 심 선수는 조 전 코치가 자신이 만 17살 미성년자였던 2014년 8월부터 평창올림픽 개막 직전인 2017년 12월까지 30차례에 걸쳐 성폭행∙성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심 선수가 피해 사실을 알린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2019년 1월 14일, 심 선수의 폭로로 용기를 낸 전직 유도선수 신유용(이하 신 선수)이 한겨레신문을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혔다. 손 모 코치는 신 선수가 고등학생 1학년이었던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0차례 정도 상습적인 성폭행을 저질렀다. 손 코치는 어느 날 신 선수를 자신의 숙소로 유도하여 성폭행을 저지른 직후 “너 막 메달을 따기 시작했는데 이거 누군가한테 말하면 너랑 나는 유도계에서 끝이다. 우리 한국 떠야 해. 한강 가야 해.”라고 말하며 협박했다. 이외에도 신 선수는 손 코치에게 수도관 파이프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맞는 등 수시로 폭행을 당했다. 


  이 두 사건 이후에도 폭로는 계속되었다. 양궁계에서 선배 선수가 동성인 후배 선수에게 저지른 성추행 사건, 여자축구계에서 감독이 선수에게 성추행을 저지른 사건, 세팍타크로(구기 종목 중 하나) 선수가 감독에게 성추행 당한 사건, 농구계에서 코치가 동성 선수를 성추행한 사건 등이 세상에 드러났다. 올해 초에는 장애인 선수에 대한 폭력 실태가 또 한 번 알려지며 대중의 공분을 샀다. 올해 2월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소속의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의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운동선수 1,554명 중 22.2%는 폭력과 학대 피해 경험이 있고, 9.2%는 성폭력 피해를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장애인 선수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 사실을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분명한 증거 입증도 힘들어 폭력에 더욱 쉽게 노출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 운동선수들의 일상에 폭력이 녹아들게 된 걸까

출처 : 이미지투데이

  스포츠 선수들의 인권과 관련하여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빙상인연대의 여준형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쇼트트랙 선수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스포츠계 악습에 대해 설명했다. “선수들은 맞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잘됐다를 판단하지 못하는 거죠.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지도자의 체벌을 경험한 선수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런 행위를 일상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걸 잘못된 줄 모르고 방치했던 무관심들이 고 최숙현 선수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게 만든 겁니다.”


  어떻게 이토록 명백한 범죄가 스포츠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자행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스포츠계 내 폭력 사건을 묵인∙은폐하는 움직임과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조치가 이 같은 악습을 견고히 하고 있다. 고 최 선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이미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경주시청, 경주경찰서, 국가인권위원회 등 총 6개의 공공기관에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신 선수 또한 유도부 동료 1명과 코치 1명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을 부탁했지만, 코치는 유도계와의 친분을 거론하며 거절했고 동료는 증언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경찰 출석 하루 전날 연락을 끊었다. 2019년 장애인 운동선수를 대상으로 한 인권위 조사를 살펴보면, 스포츠계 다른 지도자나 선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선수들 중 무려 67.3%가 ‘불이익 처분 등 2차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것은 물론 동료 선수의 피해를 증언해주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스포츠계에서 폭력 사건은 은폐되기 급급했고 가해자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은 후 혹은 처벌을 아예 받지 않은 채로 계속 근무∙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피해자들은 폭력을 견디며 선수 생활을 억지로 버티거나 아예 그만둬야 했다. 이와 같이 스포츠계 내에서 폭력이 묵인∙은폐되는 배경과 관련하여 국내 *엘리트체육환경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체육계는 윗선 대부분이 엘리트체육 출신이며 이들이 고질적인 파벌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따른 대한체육회의 봐주기식∙감싸주기식 운영은 이미 오랫동안 비판받아오고 있다. 폭력 사건이 터지면 논란을 잠재우려 서둘러 대충 마무리 짓는 식의 조치도 익숙한 모습이다.


  또한 엘리트체육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성과중심주의 하에 갖은 폭력이 더욱 쉽게 용인된다. 실력 고취를 빙자하여 자행되는 폭력은 훈련의 일종이 되고 운동선수들의 일상이 된다. 엘리트체육의 폐쇄적인 교육 방식과 환경도 선수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 선수들은 어린 나이부터 해당 스포츠에 전념하고 최상의 성과만을 목표로 달려간다. 따라서 도중에 선수생활을 그만두면 선수는 갑작스럽게 진로를 변경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부당한 상황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순응하기 쉽다. 숙소생활은 폭력의 장에서 이들을 한시도 벗어날 수 없게 만들며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터놓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팀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팀 안에서만 알고 끝나는 것이다.


* 엘리트체육은 재능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과정 중 전문적인 경기를 위해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받는 체육을 말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제도가 마련되고 나서의 ‘실행’이다

출처 : 뉴스1

  고 최 선수 사건 이후 비난받은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제도적 조치를 마련했다. 2020년 8월 11일, ‘최숙현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 공포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스포츠계에서 성과중심주의를 조장하는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에 공정한 스포츠정신과 체육인 인권 보호, 국민 행복과 자긍심 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대한체육회에 소속되어 징계 심의를 담당하던 위원회도 ‘스포츠윤리센터’라는 별도 기관으로 독립시켰다. 신고∙진술∙증언 등을 방해하거나 취소하도록 강요하는 경우 제재, 신고인과 피신고인의 물리적 공간 분리 등 비위 사실 신고와 관련된 방안도 마련되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도 높였다. 선수에 대한 폭행∙성희롱∙성폭력을 저지른 체육지도자는 자격 박탈 혹은 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혐의가 확정된 지도자의 자격정지 기간도 현행 1년에서 5년으로 확대됐다.


  대한체육회는 스포츠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특별 대책을 내놓았다. 올해 8월 초 국내 운동선수들에게 의무 사항으로 여겨지는 국가대표 훈련 관리지침에 명시되어 있던 ‘(선수)촌 내외 생활과 훈련 중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을 32년 만에 삭제하기로 했다. 대신에 지도자가 인권∙안전보호와 무관한 지시를 할 경우에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는 조항을 새로 만들었다. 또한 (성)폭력 등의 문제 적발 시 해당 팀에 전국체전 5년 출전정지 처분(단, 적극 신고 시 처벌 대상 예외), 가해 사실이 판명될 경우 ‘원 스트라이크 아웃(무관용 처벌)’ 적용 등 가해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마련됐다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2020년 2월 13일 감사원은 ‘국가대표 및 선수촌 등 운영∙관리실태’ 감사 결과를 공개했고, 스포츠계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제도와 연관된 총 40건의 지적 사항이 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조 전 코치 사건 이후 성폭행 근절 대책으로 발표한 ‘체육단체 간 징계정보 공유 시스템’ 구축 방안이 이미 과거 2013년에 수립된 방안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더해 2017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문체부는 이 방안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법적 검토 등의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2016년 3월에는 대한체육회가 (성)폭력 등 주요 비위에도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지 않고 징계 감경을 가능하게 하는 등의 문체부의 대책에 반하는 ‘스포츠공정위원회규정’을 제정했다. 하지만 문체부는 대한체육회의 이 같은 운영을 그대로 두었다. 이 외에도 문체부가 운영하고 있는 ‘스포츠 비리 신고센터’에서 해당 기관이 설치된 2014년 7월부터 3년 동안 접수된 총 10건의 비리 신고를 아무런 조치도 없이 방치한 사항, 7개의 체육단체가 국가대표 지도자 선발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을 대한체육회에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승인한 사항 등이 있었다.



   결국 모두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제도의 ‘실행’이다. 제도가 구축된 이후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가. 해당 제도가 스포츠계 폭력의 근절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제도들은 세상에 드러난 비위 사건을 급하게 수습하려 내놓은, 빛 좋은 개살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도가 마련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계 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사례도 묵인 또는 은폐하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에 따라 폭력은 ‘교육’, ‘실력 고취’ 등의 이유 따위로 절대 용인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스포츠계 전반에 형성돼야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조사와 관리가 세심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져 피해 발생 시 그 사실이 즉각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더 이상 그 어떤 폭력도 어둠 속에서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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