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이도공간>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는 리뷰입니다.
** 아트나인 네이버 카페의 '상영작 리뷰' 게시판에 실은 글입니다.
<이도공간>이 디지털 복원판으로 전 세계 최초로 국내에 개봉했다. 국내에서도 두꺼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 홍콩 배우 장국영의 마지막 연기가 담긴 유작이기 때문에 팬들의 관심이 크다. 공포영화인 <이도공간>에서마저 장국영은 섬세한 연기로 서사를 주도한다.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 안에서 그의 다채로운 표정은 능히 영화의 감정선을 이끌어간다. 장국영의 연기에 힘입어 깊은 서정성을 확보한 장르영화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도공간>은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공포라는 장르적 쾌감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영화이다.
얀(임가흔)은 이사 온 집 안에 귀신이 자꾸 출몰하는 탓에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런 얀을 걱정하는 사촌 언니는 남편과 함께 일하는 정신과 대학교수인 짐(장국영)에게 얀의 상담을 부탁한다. 짐은 상담 중에 얀의 신경쇠약 증세와 자해 흔적 등을 발견한다. 얀을 치료하기 위해 짐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귀신의 환시를 일으킨 계기가 되는, 그녀가 입은 상처에 대해 알아내려 한다. 치료 과정에서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고 얀의 상태도 회복이 된다. 둘은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짐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공포 장르에 짙은 서정성 녹이기
서늘한 작중 분위기 속에서 짐은 든든하고 자상한 인물로 활약하며 따뜻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짐은 첫 등장부터 침착하고 논리적인 인상을 준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귀신은 실재하지 않으며 정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점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후 집에서 귀신을 보고 직접 도움을 청한 얀에게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를 달래준다. 그리고 귀신이 있다는 얀의 집에 거침없이 앞장서서 들어간다. 시종일관 불안정한 모습의 얀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분위기와 집 안 어디에서든 언제든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서려 있는 상황에서, 짐의 존재는 관객에게마저 든든하게 느껴진다. 더 나아가 짐과 얀, 둘은 사랑을 이루게 되고 로맨틱한 정서까지 형성된다.
영화는 짐이 기괴한 일들을 겪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이전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이 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따뜻한 정서를 잃지 않는다. 앞선 짐의 존재감은 변질되지만 여전히 짐의 곁을 지키는 얀의 사랑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어떤 공포적 상황에서도 함께 뭉치려 애쓰는 둘의 모습이 감수성을 자극한다.
로맨틱함과 함께 애처로움의 정서 또한 강렬하다. 흔히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에서 슬픔의 정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귀신은 한을 가진 정체로서 살아생전의 애달픈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공간> 속 슬픔의 농도는 좀 더 진하다. 귀신뿐만 아니라 귀신을 보는 다른 인물들까지 모두 가엾고 아픈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 모두가 처절하고 애통한 사연을 갖고 있으며, 그 과거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현재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비현실적 공포에 현실적 공포 더하기
<이도공간>은 이렇게 짙은 서정성을 띠는 한편 공포적 에너지를 능히 유지시킨다. 이 영화의 정석적인 무서운 장면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작중 인물과 얽힌 사연은 드러나지 않고 현실감은 모호한 채로 기이한 기류가 감도는 인물과 집 공간을 관망하는 구도의 화면과, 인물들의 격한 감정이 묻어나는 흔들리는 화면이 어우러지는 연출 또한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무엇보다 귀신에 대해 정신 의학적 접근을 하는 영화의 설정이 좋은 바탕이 된다. 사실 이와 같은 과학적 접근에는 도리어 공포감을 감소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비현실적인 공포(귀신)를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감성보다 이성의 영역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공간>에서는 오히려 공포감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는 정신 질환이라는 소재에 집중하여 또 다른 현실적 공포를 만들어낸다. 작중 인물에 있어서 정신 질환 증상이 극심해질 때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 촉발되는 파괴적 행동과 관련된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과거의 잊지 못할 끔찍한 사건이 교차편집으로 갑작스럽게 반복하여 등장한다. 마치 예고 없이 인물의 머릿속에 문득 찾아와 괴롭히듯이.
서정적인 장르영화는 잘 만들어지면 영화가 끝난 후 단순한 오락적 만족감을 넘어서는, 가슴이 기억하는 여운을 남긴다. <이도공간> 역시 그런 영화이다. 싸늘한 고통 속에 가련한 사람이 있고 고독한 공포 곁에 다정한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