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바빴다. 내가 처음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왔을 때도 그 시험지를 꼬박 반나절은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 두고 다녀야 겨우 보여줄 수 있었다.
엄마의 기쁜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잘했단 소리가 한번 듣고 싶어서 반나절을 엄마 발 뒤꿈치만 보면서 쫓아다녔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면 눈물부터 보이던 물러터진 딸이 수줍게 건네는 시험지에 만족할만큼 기뻐해주기엔 엄마의 삶이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겨우 그 시험지를 건네고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강한 빛 속에 그림자처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속엔 바쁜 발 뒤꿈치와 접은 모서리가 다 헤지도록 꾸깃해진 시험지의 촉감만이 남아있다.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첫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걸음마를 겨우 배울 무렵 일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실내포장마차는 하루에 허리를 몇 번 피지도 못할 정도로 고되었다.
그 사이에 태어난 둘째는 한 평짜리 가겟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두 돌이 넘도록 신발 하나 사주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순대를 썰다, 족발을 썰다 제 손을 썰어버렸고 내내 물에 담궈야 했던 손은 밴드를 바를 새도 없이 고무줄로 칭칭 동여 매는게 전부였다.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술 취한 사람들에게 얕보이거나 주정을 받아야 할 때도 숱하게 있어도 수치스러움보다 아이들이 보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한 평짜리 가겟방에서 하루종일 노름을 하다온 남편과 내 피같은 두 아이와 서로 살을 부비며 쥐가 뛰어다니는 소릴 들으며 눈을 붙였다.
엄마 나이 서른셋이었다.
가끔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내게 최고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늘 엄마가 고팠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다. 지나는 한마디에 파르르 떨며 눈까뒤집고 뎀빌때도 있었고 바닥과 하나 되어 질질 울며 절망하기도 했다. 지금 이나이까지도 나는 그렇게 엄마를 우주로 삼고 있다.
엄마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인생을 내가 어떻게든 퉁 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어요. 여기 백점짜리 시험지가 주머니에든 아홉 살의 아이가 여기 있어요.
사람은 어쨌거나 혼자 살 수 없게 프로세싱 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애썼던 것들은 무엇일까, 인정받고 싶다.
내 이름을 올리고 삼라만상을 내 발아래 두고싶다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가 이렇게 보도블록 사이에 핀 민들레 같을 지언정 그 누구라도 내게 미소지었으면 좋겠고 내가 당신의 인생에 잠시 잠깐의 봄바람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다는 딱 그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고싶다.
인간은 평생동안 그 영향력을 확인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랜시간 나는 그녀에게 공기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겨왔지만 나는 엄마에게 때론 겨울이고 때론 봄이었겠지. 이제는 나보다 훨씬 작아진 그녀의 태산같은 등을 바라보며 그저, 봄이든 겨울이든 오래오래 몇해고 함께 볼 수 있기만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날 마음이 기회를 만든다면 엄마는 내게 더할나위 없는 찬란한 사계였노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