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
그것도 여성.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을 정제되었지만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그 폭력에 맞서 인간이 응당 가져야 할 인류로서의 본질 그 자체를 탐구하는 이야기에 온 세계가 인정했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마지막장에 읽어내렸던 그 어미의 독백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동시대를 살고 있음에 타인의 아픔에 심드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아직도 내 상태메시지는 '따뜻한 쪽으로 걸어'이다.
살다 보면 배우자나 자식의 연처럼 사건도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연이 생기게 마련이다. 내게 한강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러했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여권에 찍히는 국적 정도가 같을까, 전혀 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연이 근현대사에 빠져들게 했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나라가 두 동강 나고 권력을 두고 저열한 다툼을 벌일 때 참혹하게 돌아가신 선인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그때의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버티어 내신 분들.
감히 주어진 자유를 누리기만 한 세대로서 그때를 공감하는 건 남겨진 자료로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뿐이었다. 마음 한구석 그저 그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행위로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예의를 차렸다고 자위했을 수도 있다.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돌아와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씻겼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읽고 같은 천장을 보며 하루를 정리했다. 오늘 짝꿍을 바꿨으며 가장 친한 친구가 가까이 앉아서 기뻤다는 이야기, 내일은 누구랑 똑같은 머리를 하고 가기로 했으니 아침에 꼭 반묶음을 해달라는 등의 이야기, 내일은 추우니까 안에 한 겹 더 입어야겠다는 이야기 정도를 나누며 한참 깔깔댔다. 한 3주간을 폐렴과 감기가 돌아가며 걸린 탓에 모든 식구가 고생했지만 큰아이 작은아이 어느 하나 기침콧물 하나 없어서 다행이고 안정적인 날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 빨래를 개고 있을 때 울린 뉴스속보.
비상계엄 선포
그 밤을 겪은 모두가 그랬듯 눈을 의심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내 집 방구석에서 시옷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무장한 군인이 국회 복도를 뛰어다니는 모습은 공포스러웠고 맨몸으로 무장군인과 충돌하는 모습은 이미 써졌던 시나리오대로 흘러갈까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
반복되는 영상들을 보며 저 화면 속의 군인이 금방이라도 우리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다. 기껏 문화의 힘으로 끌어 올려놓은 국격을 이렇게 말아먹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 장 열리면 안 그래도 파란빛이 시퍼런 둥둥 심해로 끌려내려 가겠구나 환율은? 이 꼴을 보고도 우리나라가 튼튼하다고 우길 수 있다고? 북한도 보고 있을 건데 이렇게 내부에서 균열이 세게 가고 있는 걸 보면 오물 풍선이 아니라 간첩이 풍선을 매달고 날아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12월 3일 이후로 습관적인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있지도 않은 PTSD가 발동된 것처럼.
나는 좌도 우도 아니다.
중도가 아니고 그냥 내가 원래 멍충망충해서 무엇이 정의라고 어설프게 갖게 되면 마치 책 한 권을 읽은 바보처럼 온세계를 다 안다는 등의 오만을 부릴 것 같아 늘 경계해야 한다는 주의다. 지금도 변함은 없다. 오른쪽도 왼쪽도 옳은 짓은 옳은 것이고 미친 짓은 미친 짓이다.
유토피아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의 면모가 그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다만, 한 집단의 구성원을 맡고 있다면 법을 준수하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강작가님처럼 세대를 관통하는 작품으로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도 귀감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아니고 또는 엄청난 대의로 무장한 채 비장하게 깃발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의 작은 손을 내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는 그 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엄마의 따뜻한 저녁이, 수면등이 노랗게 물든 천장을 보며 나누는 각자의 일상이, 따뜻한 아이의 볼을 만지며 아 출근하기 싫다 라며 잠드는 밤이.
당연해야 하는 거다.
내게 있어 정의는 오롯이 이것이다.
나의 소중한 일상을 무너뜨리지 마라.
내 재산을 나락으로 보내지 마라.
내 나라를 망치지 마라.
우리 민족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