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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형 Oct 25. 2020

책의 오랜 습속마저 부수는 책 읽기

틈입하는 편집자, 일곱 번째 편지

수현, 


지난 편지에서 저는 편집자로 살아가기 위해선 먼저 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책 읽기를 말하면서도, 독서법이라는 방법론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해 경계했지요. 편집자가 되는 법을 묻는 이에게 편집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로 답한 것처럼, 저는 책 읽기의 방법이 아니라 책 읽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책 읽는 삶은 곧 공부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계승자이자 프랑스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가 쓴 공부하는 삶(유유, 2012)은 격조 있는 문장으로 쓰여진 공부에 관한 책입니다. 공부하는 삶의 본질적인 강령과 공부법에 관한 실용적 조언 사이에는 단호하면서도 사려 깊은 문장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에 깃든 저자의 신념과 태도가 독자를 매우 성공적으로 설득해내고 있습니다(이 책은 1920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책의 단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종교적 신념이 과도하게 전제되어 있으며, 특히 가부장적 편견이 곳곳에 투영되어 있습니다(세르티양주의 시대가 그러하지 않았냐고 강변할 수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된 시대에 버지니아 울프 같은 이들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딜레탕티슴dilettantism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배제하며, 대부분의 소설은 정신에 해롭다고 단정 짓는 것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공부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실용서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 때문입니다. 


“읽기와 공부가 정신과 삶이 되게 하라.”(203쪽) “내 생각에는 이것이 책 문제에서 핵심이다. 책은 신호, 자극제, 조력자, 기폭제다. 책은 대체물도 아니고 속박하는 사슬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246쪽) 


세르티양주는 정신과 삶을 형성해내는 텍스트, 사유가 곧 존재가 되는 것이 책 읽기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읽은 텍스트가 정신과 삶으로 도약하지 못한다면, 사유와 존재가 단절된다면, 우리의 공부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공부하는 자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다독입니다. 주어진 여건이 척박하더라도 자신을 지켜내는 것에서부터 공부하는 삶은 시작된다고, 비범한 재능이 아니라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공부하는 사람은 마치 정성을 들여 착실히 일하는 노동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세르티양주는 무엇보다 하루에 ‘두 시간’을 확보하라고 조언합니다. ‘열정적인 고독’과 ‘고요한 확실성’을 쏟아부을 수 있는 ‘두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단언하지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흘렀지만, 1920년이 아니라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두 시간’은 훨씬 더 절실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라는 개념이 가장 왜곡되고 있는 현장이 어쩌면 제도권 학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국어교사였던 이계삼은 밀성고등학교 2학년 4반 교실에서 청춘의 커리큘럼(한티제, 2013)을 썼습니다. 이 책은 E. F. 슈마허, 웬델 베리, 하워드 진, 도로시 데이, 다카기 진자브로 등을 통해 공부의 이유를 찾고, 대중문화, 민주주의, 핵 문제, 전쟁과 평화, 문학, 교육, 철학, 영성 등을 논하며 공부의 길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계삼은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숨죽여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가끔 나는 아이들의 무구한 얼굴들을 바라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사의 격랑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견뎌내야 할 세파의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 저리곤 했다.”(8~9쪽) 그러면서 그는 “청년들이 이 가망 없는 대학과 취업의 좁다란 울타리를 걷어차고, 드넓은 들판을 질주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희망합니다. 그때 그가 가르쳤던 교실의 아이들이 그의 바람대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는 이제 그렇게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계삼은 이 책의 출간을 즈음하여 11년간 교사로 일하던 고등학교를 떠나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에서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2010년 3월 11일, 한 대학의 교정에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그 학교를 다니던 김예슬이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로 시작하는 대자보의 문장들은 결연하고도 아름다웠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으며 한편으론 아슬하고 위태로운 마음이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회의가 교차하였지요. 얼마 후 그의 작은 책 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가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작은 책이 얼마나 많은 삶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지 곱씹습니다. 제대로 된 책 읽기는 책 자체에 대한 오랜 습속마저 부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과 ‘삶’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학’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86쪽)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겪고 만나고 헤매고 상처받고 저항하고 사랑한 만큼 만들어진다.”(88쪽) 


저는 이 책의 갈피 한 모퉁이에 적어두었습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김예슬’들을 열망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수현,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이 책들을 읽을 수 있기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많은 책들을 상상해낼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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