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며칠 전에 인쇄소에 맡겨 놓았는데, 인쇄소에서 '회사 카탈로그'가 나왔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그 카탈로그도 인쇄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무도 인쇄하라고 얘기를 안 해주었기 때문이다. 인턴이 끝나기 며칠 전에 상무님이
"ㅇㅇ씨 인턴 끝나기 전에 카탈로그 다 인쇄해놓고 가야 하는 거 알지?"
네...? 몰랐는데요....
"몇 권 할까요?"
"300권 정도 해야 되지 않나?"
헐레벌떡 카탈로그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도 전임자가 해놓고 간 것이어서 달라진 가격이나 추가된 상품만 넣으면 됐었기에 작업은 수월했다. (그때까지는....)
처음 하는 일이라 인쇄소에 작업 맡기는 것도 나한테는 어려웠다. 몇 도 인쇄인지, 종이 종류는 뭐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인터넷을 막 뒤졌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인쇄를 맡겨봐서 파일 하나만 보내면 될 걸 또 불안해서 3개씩이나 보냈다. 그래서 인쇄 담당자한테 욕을 들어먹었다^0^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죄송하다는 말뿐....
그렇게 인턴 마지막 날, 카탈로그를 찾으러 갔다. 같은 건물에 위치하고 있어서 끌차로 300권 분량을 나 혼자 끌고 왔는데, 끌차가 말을 안 들어서 엄청 낑낑 댔다. 그렇게 겨우겨우 회사로 들고 왔다.
"오, 수고했다. 나온 거 한번 보자!"
상무님이 한 권을 펼쳤다.
"어? 여기 가격이 잘못됐는데?"
멘붕의 현장
네....?
불행 중 다행인가? 나는 솔직히 상무님께 엄청 깨질 줄 알았다. 그런데 엄청 쿨하시게 가격을 볼펜으로 수정하고 영업하러 가셨다. '그동안 일 하느라 수고했다. 다 수정하고 퇴근할 수 있겠지?'라는 말과 함께...
다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지나더라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다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수로 다른 파일을 보냈던 것이었다.(어휴...) 그래도 다행이긴 했다. 수정해야 할 부분이 가격밖에 없어서... 만약에 제품이 통째로 빠졌으면 다시 인쇄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지...' 하다가 갑자기 내 뇌리를 스친 하나의 생각.
'라벨지!!!'
이 생각했을 때 난 신이 도와준 줄 알았다. (사실은 무교.)
회사에서 프린트하는 일은 거의 내 담당이었고, 종이도 다 내가 채워 넣었기 때문에 라벨지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벨지를 찾으니... 무슨 신의 운명인가...? 라벨지가 딱 한 장 밖에 안 남아있었다.
나는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가격을 수정하고, 그 부분만 따서 300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한 장에 모든 게 걸린 나의 운명... 두근두근... 아주 멋있게 라벨지에 인쇄된 숫자들... 칼로 빗금을 그어서 일일이 300권의 카탈로그를 펼쳐서 붙이기 시작했다.
라벨지가 인쇄되었을 때가 한 5시 가까이 됐었을 거다. 난 그때 다시 초능력을 발휘했다. 무조건 퇴근시간에 맞춰서 가리라는 생각에 말도 안 하고, 물도 안 마시고 계속 붙여댔다. 다행히 다른 직원분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들 자기 할 일에 바쁘셨다.
무슨 미션 받은 것처럼 "본부에서 이 시간까지 하라고 명령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을 붙이는 그 순간, 시간은 6시도 채 되지 않았다. Mission Complete.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수정 작업을 다 마쳤다.
마지막 장 다 붙이고, 시간 확인 했을 때의 내 심정
평소에 행동이 좀 느린 편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초능력이 나왔을까... 어떻게 라벨지를 딱 생각했을까... 역시사람은 급하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맞았다.
내 실수를 다 만회했다는 마음에 스스로 뿌듯했다. 그렇게 인턴 마지막 날에 직원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는 수고했다며 인센티브(?)를 더 챙겨 받고 정시에 룰루랄라 퇴근했다. (인센티브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혹시 제가 일 편하게, 대충 다녔다는 말이 나올까 봐입니다! 저 진짜 열심히 일했답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으신 분들은 라벨지로 그 부분만 300개 출력해서 일일이 붙이는 방법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땐 내가 생각해낸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었다.(사실 경력자들은 이런 실수를 잘 안 하실 듯하다...)
원래는 초능력이 발휘되지 않도록 실수를 만들지 않거나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게 맞지만, 사람일이라는 건 원래 모르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급한 일이 터질지 모른다.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나의 초능력(?) 덕분에 회사에 피해가 없게 마무리했다. 초능력을 발휘한 건 좋았지만,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