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많이 받아서 상을 몇 번씩 탔었다. 중학교 때 ‘너는 글을 잘 쓰니까, 크면 작가하면 좋겠다.’라고 반 아이들이 있는 앞에서 나에게 칭찬을 해주신 선생님의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상황과 환경에 부딪혀 점차 꿈을 잃어갔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지만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진로를 선택했다.
대학 졸업 후 전공 관련 일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방황 중에 나는 내 안에 숨겨두었던 오래된 꿈인 '작가'를 꺼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중학교 선생님이 나에게 '작가해도 되겠다.'라는 칭찬으로 그때부터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우선 보통의 사람들이 나의 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꾸준히 글을 쓰니 블로그 이웃, 인스타 팔로워들이 많아졌다. 칭찬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비판의 글도 있었다. 남에게 나의 글을 보여주려면 비판과 혹평은 견뎌야 한다는 어느 책 말마따나 나는 그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리고 글을 쓴 지 약 2개월 만에 <브런치>에서 작가 승인을 받게 되어 여기서도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을 꽁꽁 감추고, 내 글에 악플을 달면 어쩌지? 했던 과거에서 나는 더 성장했다.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랜선 친구들의 격려와 칭찬 덕분이었다. 칭찬이 없었더라면 나는 <브런치>를 그저 즐겨찾기 탭에 넣어놓고 바라보기만 했을 것이다.
내 글을 누구나 봤을 때 ‘정말 잘 쓴다.’, ‘감동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라는 극찬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칭찬이라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그 작은 칭찬을 성장 발판으로 삼아 <브런치>뿐만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보려 한다.
@솔립
어린 아이나 학생에게 ‘넌 글을 잘 써’, ‘넌 그림을 잘 그려.’, ‘넌 웃기는 재주가 있어.’, ‘넌 달리기를 참 잘하는 구나.’ 같은 칭찬은 나중에 그 사람이 진로에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더 폭넓은 진로의 선택지를 만들어준다. “아, 그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다시 해볼까?” 하며 기분 좋은 도전을 한다. 나처럼 말이다.
소소하게 ‘넌 글씨체가 참 예쁘구나.’, ‘넌 네 주위를 참 깨끗하게 쓰는구나.’, ‘넌 참 부지런하구나.’처럼 작은 칭찬도, 칭찬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루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다.
다만, 외형적으로 ‘예쁘다,멋지다.’나 ‘착하다.’라는 표현은 별로 좋은 칭찬이 아니라고 한다. 외형적인 모습만 칭찬하면 어른들의 ‘예쁨’의 기준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서 좋지 못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 또한 ‘착하다’도 반복하다보면 아이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서 이야기 해야한다.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빠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릴 때의 칭찬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못했을 때의 ‘꾸중’도 필요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는 ‘칭찬’ 받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가끔씩 ‘칭찬하면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안 한다.’라는 선생님도 있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잘하면 침묵, 못하면 꾸중.’ 그건 그냥 선생님이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아닐까?
잘한 건 잘한 것에 대해 칭찬하고, 못한 건 못한 것에 대해 꾸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제목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켄 블랜차드'의 책 제목입니다.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육중한 덩치의 고래가 칭찬 한 마디에 춤을 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칭찬의 힘'은 대단합니다. 혹시 내가 양육자나 교육자라면, 나의 아이나 학생에게 당근보다는 채찍을 더 많이 주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