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봄의 기억
학창 시절의 기억은 왜 이리 아름답게만 추억될까요
아직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그 날은 여느 주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석식, 일명 특식이 나오는 수요일이었다. 우리 학교는 고3이 유일하게 야자를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는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이 수요일마다 맛있는 메뉴를 석식으로 제공하여 학생들을 야간 자율 학습의 늪으로 유혹했다. 그날도 친구들과 나는 야간 ‘자율’ 학습을 위해 석식을 먹기로 하였다. 특식 메뉴는 우리가 ‘자율’ 학습을 할지 여부를 정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급식 표가 나오는 날부터 우리는 맛있는 음식에 저마다 좋아하는 색의 형광펜 칠을 하고는 그 날만 바라보고 살곤 했다. 그 날 특식은 삼계탕과 기타 메뉴였다. 삼계탕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외의 메뉴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식 수업 시간이 끝난 후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선택적 심화 학습 시간이었다. 나는 수학 수업을 들었다. 수학은 싫어했지만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당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남자 수학 선생님은 빛이 났다. 유난히 햇살이 따사롭던 그날 오후, 선생님에게선 햇빛 같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낮게 울리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수업에는 집중 안 하고 선생님만 바라보던 그때 그 시절 교실 맨 뒤에 앉아 있던 나. 선생님이 수식을 써 내려가는 동안 뽀드득거리던 분필 소리와 저녁 바람에 날리던 연한 연두색의 교실 커튼. 수업 시간이 지나갈수록 창문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오던 그림자.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학 심화 수업까지 마치고,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는 과자 부스러기를 발견한 비둘기들처럼 급식실에 삼삼오오 모여 줄을 서고는 고개를 빼 급식 아주머니가 배식 준비를 하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얼른 먹고 싶어 현기증이 났다. 배식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어쩌면 월요일부터, 아니 어쩌면 급식표가 나온 그날부터 기다리던 삼계탕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계탕이라고 칭해지는 닭다리가 하나씩 들어간 허연 국물이 나왔다. 비주얼부터 실망스러웠다. 핏물이 덜 빠진 붉은 빛깔의 닭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났다. 내가 일찍 귀가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것이 이것이라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대충 해치우듯이 저녁밥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언제나와 같이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산책이라고 해 봐야 별 것 아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심지어 산 근처인 교사 뒤편까지 걷게 되면 풀벌레 무리와 마주쳤기 때문에, 교사 앞쪽만 돌았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한 바퀴도 아니고 반 바퀴만 돌았다. 시간은 여섯 시를 훌쩍 넘겼음에도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기에 하늘은 검은빛보다는 푸른빛에 가까웠다. 우리는 고3이 되어 잘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 근육을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딴에는 굉장히 열심히 걸었다. 걷는 동안에는 하늘을 보았다.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이 예뻤다. 뺨에는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봄바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바람에서는 산에서 오는 풀내음이 났다. 산책하는 동안에 수학 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역시나 허탕이었다. 선생님은 일찍 퇴근하셨다고 했다.
그날은 석식도 선생님에 대한 마음도 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좋은 하루였다. 하늘이 예뻤고 바람도 좋았고 계절이 바뀔 때 나는 냄새도 좋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계절이 오면 그 날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