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06

악마가 되어서라도 널 지켜줄게

by 에스

06


2학년


그 사람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이후 우리의 교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는 연애에 올인하는 듯,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캠퍼스에서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1학년 초에 잠깐 마음이 갔었던 1살 위의 K와 부쩍 친해져 있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한 편이었지만, 어쩐지 K에게는 초 적극녀가 되어서 거의 매일 메시지를 보냈다. 시답잖은 이야기도 그는 잘 받아주었다. 결국 2학년이 되어서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란만장한 가을이다.
아주 짜증 나는 일이 있었다. 사건은 벌써 몇 주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겨우겨우 얄팍하게나마 다시 형성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단숨에 무너지는 걸 또다시 경험해야 했다.


몇 주 전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모두 해산하려는 찰나에 과대 언니가 모두를 멈춰 세웠다. 모두들 의아해서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어제, 익명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저보고 그딴 식으로 할 거면 과대 하지 말라더군요. “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허당 기질이 있기는 해도 나름 과대 역할을 잘해왔기 때문이다. 가끔 공강이나 보강 수업을 안내하는 문자를 까먹어서 우리를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저런 문자를 보낼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웅성웅성하기 시작했고, 과대 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주말까지 자수를 받겠습니다. 자수하지 않는다면 저는 통신사 회사에 가서 보낸 사람의 휴대폰 번호를 밝힐 거예요. 그리고 공개사과를 받을 겁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화가 났다. 누가 저런 비열한 짓을 했담.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 말을 하지. 그럴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서 나오면서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얼른 범인을 잡아내자고 과대 언니를 위로해 주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범인이 누굴지에 대해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범인이 밝혀지면 아예 그 사람을 과대로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본인이 하라지!”


나도 큰 소리로 들리지 않을 범인을 향해 소리쳤다.



궁금함에 가득 찬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 월요일이 되었다. 미술사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위해 강의실을 찾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 사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ㅇㅇ아, 잠깐 얘기 좀 해.”

“오빠?”


우리는 등나무 벤치 아래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전에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무겁게 입을 뗐다.


“ㅇㅇ아, 네가 그런 게 맞아?”

“뭐가요?”

“문자 말이야. 통신사 가서 확인했는데, 과대한테 문자 보낸 번호가 네 번호래.”

“네???”


그야말로 뒤통수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내 번호라고?


“제 번호라고요? 어떻게?“

“아니지? 네가 아닌 거 맞지?”


그는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했다.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이거 봐. 문자 기록이랑 보낸 시각이야. 수요일 1시에 어디에 있었고 누가 네 폰을 건드렸는지 생각해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누구지. 왜 하필 날 건드린 거지. 왜 나지.


“ㅇㅇ아 많이 당황했지, 울지 마. 오빠도 지금 진짜 화가 나. 범인을 꼭 잡고 말 거야. 누가 그랬는지 밝혀내고 말 거야. 이것 때문에 네가 피해를 입는 일이 없게 막을 거야. 내가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지켜줄 거야."


나는 다음 강의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도서관 2층 테라스로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고 할까. 왜 그랬어야 했을까. 심지어 같이 공부하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기를 속여가며.


과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받았다.


“ㅇㅇ아 어디야? 언니랑 만나자. 네가 아닌 거 알고 있어.“


나는 언니에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겨우겨우 말했다. 그녀는 일단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며 내가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와 K, 그 사람, 과대 언니는 도서관 테라스에 앉아서 문자 기록을 보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내려 안간힘을 썼다. 요일과 시간표를 대조해 본 끝에, 서양화 시간이 끝난 점심시간이었으며, 우리는 시간이 남아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날임을 기억해 냈다. 그곳에서, 내 핸드폰을 가져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K와 찍은 사진을 보자며 꽤 오래 핸드폰을 만졌던 언니인데, 우리는 모두 그 언니가 범인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언니는 화를 내며 자신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물론 증거도 없었다. 언니는 오히려 내 번호가 나왔는데 왜 자기를 추궁하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과대 언니가 더 이상 일을 끌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그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파란만장한 가을이었다.


그럼에도, 내 핸드폰 번호가 떡하니 기록지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뼈저리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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