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37

술에 취해

by 에스

37


1월
우리는 넬 콘서트를 보러 갔다.


토요일 아침 일찍 합류해서 케이를 타고 광주로 갔다. 11월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 그는 못 본 새 스타벅스 편의점용 유리병 모카커피에 빠져서는, 엄청나게 맛있다며 찬양을 했다. 우리는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그 '맛있는' 스타벅스 커피도 사 먹으며 광주로 향했다.


뒷좌석에 종이가방이 있네 싶었더니, 나에게 줄 거라며 주었다.


하늘색에 노란 뚜껑의 종이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 때문에 채 닫기지도 않았다. 그는 속상하다는 듯이 꼭 맞을 것 같았는데 쬐끔 모자란다며 찡찡댔다.


안에는 셜록홈스 단편 특집과 세 얼간이 책 두 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상자 뚜껑이 안 닫히게 만든 주인공인 셜록홈스 북엔드까지. 돌아다니다 발견하고는 내 생각이 나서 사모은 것들이랜다. 책의 속표지에는 그가 쓴 편지가 적혀있었다. 게다가 전주에서 샀다는 엽서까지. 이렇게 한꺼번에 뭔가를 받고 나니 기분이 얼얼했다. 행복하다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광주에 12시쯤 도착한 우리는 여유롭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는 광주에 제주흑돼지가 유명하다며 맛집을 알아왔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막상 고깃집은 전부 문을 닫아서 그냥 근처의 레스토랑엘 갔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콘서트장에 갔더니 이미 사람이 꽤 많이 와 있었다. 우리는 팔찌를 받고 이벤트장에 가서 핑거라이트와 소원카드를 받았다. 소원카드는 두 장을 골라서 한 장은 넬에게 보내고 한 장은 소장하는 거였는데, 우리는 서로의 소장용 카드에 메시지를 써 주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엄청나게 긴 장문을 써 주었다. 나는 막상 쓰려니 생각이 안 나서 머리를 쥐어짜다가, 딱 한 마디만 써서 주었다. '전주엔 언제 갈 거야?'


입장 대기줄을 4시에 서는데 그전까지 시간이 아주 많아서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하지만 체육관에 온 모든 팬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앞의 카페는 미어터져서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우리는 근처를 정처 없이 헤매다가 결국 편의점 의자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는 식빵 샌드위치를 사서는 테두리만 쏙 빼놓고 먹는다. 대책 없이 애들 입맛이다.


시간이 되어 줄을 서기 위해 다시 들어갔다. 줄을 서서 아주 오래 기다린 끝에 공연장으로 입장했고, 스탠딩 44,45번이던 우리는 앞에서 무려 두 번째에 설 수 있었다. 기다리면서 뒤에서 배달되는 짐들을 앞쪽 공간에 놔주고, 그러다 보니 앞의 사람들과 몇 마디를 나누기도 했다. 앞에 있던 여자분이 둘 다 팬 아니었냐며, 미리 팬인 줄 알고 사귄 게 아니냐며 깜짝 놀랐다. 그럼 대체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우연처럼...'이라고 말해 웃음을 주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는 처음 보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 준다.


공연은 이제껏 가본 공연 중 최고였다. 선곡부터 시간까지 거의 3시간 동안 정말 재미있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공연장을 나와 케이를 찾았다. 저번 주차장만큼은 아니지만 잠시 헤맨 끝에 케이를 탔다. 공연이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던 우리는 너무 피곤해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역 근처 번화가에 가서 무인텔에 방을 잡기로 했다.


무인텔은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인데 정말이지 신기하고 최첨단이었다. 방에 짐을 풀고 다시 나와서 근처에서 치맥을 먹기로 했다. 웬일로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그는 소주를 먹고 나는 소맥을 먹으며 낄낄대며 끝없이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네이트온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쪽지들을 다 읽었다고 말했다. 분명 나의 수신확인란에는 읽지 않음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낸 두 개 정도는 읽지 않았다길래, 나는 읽어보라고 하고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화가 난 말투. 돌아가자며 일어나려고 하길래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나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그가 화가 난 것을 이렇게 해석했던 것 같다.


최근에 보낸 쪽지의 내용은 내가 와인에 취해 전주 여행에 대해 쓴 글이었다. 그가 쪽지를 볼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솔직하게 썼었다. 그래,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끝이구나.


이제 끝.


그 생각에 나는 울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 같다. 그가 나를 붙잡고 숙소로 돌아오던 내내, 생각했다. 드디어, 이제 죽는 거구나. 어떤 방법이 있을까. 어디로 가야 뛰어내릴 수 있을까. 생각보다 두렵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방법과 시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았어,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아팠던 것 같다.


그리고 방에 와서는 그가 갈까 봐 가지 말라며 울었고 침대에서 떨어졌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해서 무서웠다. 그래도 결국 안 간다며, 어른답게 나를 침대에 재웠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 7시였다. 창문이 있었지만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12시쯤인 줄 알았는데. 그는 내 옆에서 돌아 누운 채 자고 있었다.


차마 다가가 안을 수 없는 채, 지끈거리는 머리로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거의 한 시간 넘게 고민했다. 일단 잘 기억이 안나는 것처럼 얘기해서 먼저 어떻게 말을 꺼내는지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는 정동진을 떠올렸다. 바닷가의 미칠듯한 추위. 2월이 오기 전에 혼자 정동진을 가서 그 바닷가 속에 홀로 웅크리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에 전화로 목소리정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네. 하며.


10시 반으로 알람을 맞춰놓고는 그 후로 조금 잘 수 있었다.


알람이 울려서 우리 둘 다 깼고,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말투가 싸늘하진 않아서 나는 띄엄띄엄 기억이 난다며 찡얼댔다. 그는 내가 끌어안게 놔둔 채 기억이 안 난다면 할 말도 없다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빨리 일어나라며, 가자고 했다. 그래도 나는 필사적으로 조심조심 얘기를 꺼냈다. 당신이 화가 난 것 같았고, 나도 화를 낸 것 같았다며. 그런데 당신이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몇 번 거부하다가 끝내 화난 이유를 말해주었다.


너는, 죽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고 말했다.


쪽지의 내용 때문인 것 같았다. 힘들게 버티고 있는 거 안다며. 하지만 너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며.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다며. 하지만 앞으로 20년 후에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지는 살아봐야 아는 거라며, 아주 힘든 청춘을 보낸 어머님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은 채, 사과했다. 잘못한 건 아니라며 그가 말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냥 '그러니까 안아줘'로 대신했다. 그는 나를 안고는 머리를 토닥, 토닥, 토닥였다.


나는 그때 화가 났던 게 당신을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안 볼일은 없을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말에, 나는 절망과 기쁨이 반인 채, 다시, 다시 삶으로 돌아와 버렸다.


우리는 대충 씻고 근처 해장국 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터미널에 가서 티켓을 끊고는 그를 먼저 보냈다. 그래도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있어서 나는 터미널 안 카페에 들어갔다.


자신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망치지만 않았어도 더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그도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어쩌면 이후로 멀어질지도 모른다. 아니, 멀어지게 되겠지.


어쩌면, 그는 우리의 이런 관계를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내가 쪽지로 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해 버렸기 때문에 화가 난 건지도 모른다.


얘기한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데. 우리는 계속 이런 관계일 수밖에 없는데.


나 자신이 한심하다. 이 현실이 그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견디기 힘들다.


그 사람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목숨을 끊고 싶은 마음은 점점 더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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