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뒤의 나에게

2부 EP14. 비와 오일파스텔

by 에스

벚꽃 잎이 휘날리는 4월 초에 뜬금없이 태풍이 왔다. 낮부터 비가 조금씩 떨어지더니 저녁에는 세찬 비바람이 되어 창문을 뒤흔들며 시끄러운 굉음을 냈다. 거기에 늦은 오후에 마신 커피까지 가세해서, 결국 새벽 5시에 잠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내 전생이 비와 뭔가 긴밀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을 정도였다. 빗소리도, 공기에 가득 찬 습도도, 비 냄새도 너무 좋다. 빗방울이 창문을 톡톡 때리는 날에는 하염없이 창 밖을 쳐다보며 앉아 있게 된다. 나에게 '날씨 좋다!'란 햇빛이 찬란한 날이 아니라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은 결코 비 오는 것이 좋지 않았다. 저녁 7시에 제주시에서 그림 모임이 있었는데, 비바람을 뚫고 운전하기엔 제주시는 너무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참석하기로 해놓고 빠지기는 미안해서 결국 거의 한 시간 여를 운전해서 시내에 있는 카페로 갔다.

도심의 도로가에 위치한 카페에는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M이 먼저 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모임에서 나에게 오일파스텔에 대해 가르쳐주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새로 산 오일파스텔을 개봉했다. 문교에서 만든 소프트 오일파스텔 72색으로, 튼튼한 나무 케이스에 들어 있다. 색색깔로 가지런히 정렬된 파스텔들은 정갈하고 보기 좋았다. 이 녀석을 가지고 열심히 그려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이번 모임에는 처음으로 그림 주제가 있었다. <5년 뒤의 나>에 대해서 표현하기이다. 5년 뒤라. 카페 사장까지는 아니어도 매니저 정도는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커피를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을 그리자.

연필로 연하게 밑그림을 그리고 지우개로 살살 지워서 스케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게 만든다. 그리고 흰색 오일파스텔을 바탕색으로 먼저 칠한 후, 원하는 색감의 파스텔들을 골라 테이블 위에 놓아둔다. 색깔 하나하나, 골라서 부드럽게 펴 바른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감을 원했기 때문에 빨강, 주황, 노랑, 갈색 등의 색을 많이 사용했다. 군데군데 초록이나 파랑으로 포인트를 주고 맨 마지막으로 배경을 칠한다.

그림을 그리며 마주 앉은 사람들과 도란도란 근황 토크를 한다. 다들 20~30대라 그런지 연애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상처 입은 연애, 행복했던 연애, 원하는 연애. 각자의 생각에 공감해 주고 자신의 생각도 말하면서도 손은 끊임없이 그림에 집중하는 차분한 시간. 그러다 목이 마르면 각자 주문한 차를 한 모금 홀짝인다.


B4 크기의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그림을 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 하나에 다섯 명이 모여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5년 뒤의 자신에 대한 표현방식은 다들 다양했다. 나와 같이 오일파스텔 작업을 한 여자분은 평온하고 안정된 느낌을 바라는 마음에서 잔잔한 바다를 그렸다. 자신만의 식당을 내고 싶은 남자 동생은 식재료들로 귀여운 캐릭터를 그렸고,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다른 남자 동생은 해변을 걷고 있는 본인을 그렸다. 5년 후에도 지금 직장을 다니며 퇴근 후에는 방바닥에 편히 앉아 플레이스테이션을 할 거라는 오빠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꿈에 공감하고, 응원을 보내 주었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모임이 끝났다. 비는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사이드미러에는 뒤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방울이 맺혔다. 다들 헤드라이터를 켜고 바쁘게 퇴근길을 달리고 있다. 거기에 나도 합세해 흠뻑 젖은 도로에 반짝거리는 불빛을 만들어냈다.


5년 뒤라. 당장 내일 사냐, 마냐도 힘들어하는 내게 '5년 뒤의 내 모습'이라는 주제는 꽤 어려웠다. 하지만 만약, 살아 있다면. 불행한 모습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림 속의 내 모습과 다를지라도, 본인의 선택에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tc29-dream.jpg



이전 13화정동진에서의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