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에서의 결심

2부 EP13. 충동파, 그들과의 여행

by 에스

별군이 '입사하자마자 왕따를 당한 막내', '비정규직 언니', '이른 나이에 출산을 해서 어울릴 데가 없는 아기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의 소외된 사람들을 모아 만든 '충동파'는 총 두 번의 여행을 갔다.


2014년 여름, 아기엄마가 빠진 나머지 네 명은 전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우리는 한옥마을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키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유명한 전동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고 전주비빔밥에 만두, 아이스크림까지... 온종일 먹고 또 먹었다. 저녁에는 막걸리 집에 갔는데, 좀 특이한 곳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킬 때마다 안주가 새로 나오는데, 처음에는 기본적인 안주가 나오다가 막걸리를 시킬수록 점점 안주 퀄리티가 높아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최종 안주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서 미친 듯이 막걸리를 들이켰다. 살면서 그렇게 막걸리를 많이 먹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은 결국 마지막 안주를 가져오셨고! 내 기억에 그것은 산낙지였던 것 같다. 사실 거의 기억이 없다...

식당에서 나와서는 숙소로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한 놈은 평상에 눕고, 한 놈은 전남친에게 전화를 하고, 한 놈은 오르막길을 올라 도망을 가고, 나는 그놈을 잡으러 가고. 그래도 무사히 숙소로 들어가서 한바탕 늦잠을 잤다고 한다.

둘째 날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막걸리 향이 나는 것을 경험하며 콩나물 국밥으로 해장을 했다. 정신을 차린 후 벽화 마을에 가서 예쁜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길을 걷다가 사주 보는 곳이 있어서 들어가서 사주도 보았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한 명씩 사주를 봐주셨는데, 나에 대한 사주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을 거라는 말에 우리 모두가 숙연해졌다. 마지막으로는 청년몰에 가서 구경을 하고 소원팔찌도 사서 하나씩 했다. 우리들은 찍은 사진들을 모두 단체 채팅방에 올렸고, 아기 엄마 언니는 너무 부러워하며 다음엔 꼭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겨울에 이루어졌다. 2014년 12월에 충동파 완전체가 갔었던 정동진 여행은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겨울 바다를 보고 싶었던 우리는 정동진으로 여행 장소를 정했다. 계획적인 성격의 별군이 숙소를 예약하고, 스케줄을 짰고, 우리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여행 준비를 했다.

동해 바다를 보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제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꽤 긴 기차여행이었지만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며 여행 자체를 즐겼다.

긴 기차여행 후에 도착한 정동진은 이렇게 추울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 추웠다. 바다를 제외한 모든 곳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바다를 보며 낭만을 떨기에는 바닷바람의 매서움이 더 컸던 탓이리라. 우리도 적당히 바다를 걷고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숙소는 근방에서 유명한 선박 모양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깨끗하고 넓은 것이 정말 맘에 들었다.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와 근처의 횟집에 들어갔다. 관광지인 만큼 음식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지만, 또한 관광지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즐기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도 음식도 먹을 만큼 먹고 나서, 밤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한겨울 정동진의 밤은 정말이지 매서웠다. 칼바람에 귀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검고 어두운 바다는 울부짖었다. 해변에는 모래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두껍게 눈이 쌓여 있었다. 누구 하나 파묻혀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잊지 못할 생각을 했다. 정말로 죽고자 하는 결심을 했다면, 겨울 정동진으로 오자. 눈과 바람이 나와 함께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그때 당시 허니버터칩이 등장해 엄청난 인기와 함께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려 '그' 허니버터칩이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우리 모두가 눈이 돌아가 버렸다. 보이는 동시에 허니버터칩을 집어든 우리는 숙소에 와서 술과 같이 그것을 맛보았다. 맛은? 그냥 그랬다고 한다.

아무튼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던 우리는 퀭한 몰골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래도 일출은 보자며, 하나 둘 좀비처럼 일어나서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너무나 피곤한 와중에도 일출은 멋졌던 기억이 난다. 체크아웃을 하고 밥을 먹은 뒤, 한참 남은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카페에 들어가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전날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던 탓에 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피곤과 추위에 절은 여행이었지만,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벌써 이것이 9년 전 일이다.

언제까지고 함께 놀러 다닐 것만 같았던 우리였지만, 하나 둘 결혼을 하면서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고 다섯 명이 다시 모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 되었다. 이제 나는 멀리 제주로 와버려서 더욱 만나기가 힘들어졌지만, 멀리 있어도 늘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하고 힘이 되는 존재들임을 알기에 버틸 수 있다.

언젠가, 각자 키우는 자녀들이 훌쩍 자라고 난 뒤에, 그때처럼 모여서 밤새 시끌벅적 수다를 떨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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