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EP10. 그림모임과 급격한 우울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버는 족족 술을 먹고 노는 데 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근무일에는 죽어라 일을 하고, 쉬는 날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자, 술 먹고 의미 없는 대화를 하고 웃고 떠드는 일이 모두 시들해졌다. 계기가 된 것은 동생과의 대화이다. 육지에 올라갔을 때 동생도 내 스케줄에 맞춰서 본가에 왔다. 엄마와 나, 동생은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이 늦자 엄마는 먼저 주무시러 동생 방으로 들어가시고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동생에게 솔직하게 제주 생활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가 아무 목적 없이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동생은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밤늦게 시작된 이야기는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끝이 났고, 이 대화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제껏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인간관계를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주로 돌아온 나는 뭔가 생산적인 활동이 없을까, 알아보다가 그림 소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림 전공 여부와 무관하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모임으로, 주로 제주시의 카페에서 번개 모임을 열곤 했다. 나는 애월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쉬는 날에 모임이 열리면 최대한 참석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첫 모임에서 만난 운영진 여자 동생은 오일파스텔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오일파스텔이란 것을 그때 눈앞에서 처음 보았다. 초등학생 때 쓰던 파스텔처럼 막대 모양이었지만 가루날림이 거의 없고 질감은 오히려 크레파스와 닮았다. 그녀는 나에게 오일파스텔을 써보라고 권했다.
파스텔이라고 하면 초등학생 때 사용하던 손가락에 가루가 잔뜩 묻는 네모난 파스텔만 알고 있던 나에게 오일파스텔은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분명 고체인데도 종이에 문지르면 뭉툭하고 진득하게 밀려나가는 그 질감이 너무 신기했다. 나는 그녀의 오일파스텔로 비양도와 협재 바다를 그렸다. 첫 사용이라 그런지 질감을 다루는 것은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끄러지지 않고 걸리는 듯한 마찰이 싫지 않았다. 질감을 만들어내며 덧씌워지는 흰색, 그 위로 원하는 색을 하나씩 얹는다. 손이나 휴지로 뭉개면 부드럽게 풀어지며 색의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의 색깔이 된다. 수정하는 법도 간단하다. 그저 다른 색을 덧칠하면 그뿐. 내 삶도 오일파스텔마냥 원하는 다른 걸로 덧씌우면 수정이 되면 좋겠다. 후회되는 일도, 되돌리고 싶은 일도 많다. 하지만 나는 오일파스텔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또 살아갈 뿐이다. 상처 입은 채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채색을 하다 보니 협재 바다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매력적인 채색 도구였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그날로 오일파스텔 72색을 구매했다.
그림 모임에 참여하고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극심한 우울에 시달렸다. 내가 사장감이 아니라는 깨달음과 앞으로 업으로 삼을 직업을 찾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겹쳐진 탓이다. 정신과 약을 매일 복용하고는 있지만, 딱히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중, 지인 한 명이 크로스핏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는 거의 3년째 크로스핏을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광으로, 내가 근력이 부족하고 잠을 못 자는 것은 운동이 부족해서라며 거의 억지로 자신이 다니는 크로스핏 센터에 나를 데리고 갔다.
크로스핏은 다양한 종류의 동작을 빠른 시간에 높은 강도로 해내는 운동으로, 예전에 잠깐 다녔던 필라테스와는 결이 전혀 달랐다. 매우 역동적이고,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승부욕을 자극하는 것도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주 2회권을 끊어 그와 같이 크로스핏을 다니기 시작했다. 역도, 버피, 윗몸일으키기, 줄넘기, 달리기, 푸시업, 스쿼트 등 매번 다른 동작을 배우는데, 할 때는 너무 힘들지만 재미가 있고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일상은 아르바이트, 그림 모임, 운동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가만히 집에 처박혀 있거나 근처 카페를 간다. 이 모든 활동들이 내가 다시 일어나고, 더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