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그려나가는 그림
2부 EP19. 강에 대하여
그림모임에서 꾸준히 활동하던 나는 '강'이라는 사람과 친해지게 되었다.
본인의 MBTI가 ENTJ라고 소개한 그는 그에 걸맞게 외향적이고 계획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꽃이나 자연물을 주로 그렸다. 따뜻한 색감을 주로 사용하는 그는 오일파스텔을 곱게 뭉개서 붉게 지는 노을이나 초록 들판을 아주 그럴싸하게 그렸다. 장비 욕심도 있어서, 커다란 등산용 배낭 속에는 오일파스텔뿐만 아니라 색연필 세트, 볼펜, 스케치북 등 온갖 그림도구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200색이 넘는 마카펜을 구입해서 커다란 배낭처럼 생긴 가방에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저걸 다 어떻게 들고 다니지?라고 궁금해했다가 근육질의 몸집을 떠올리곤, 과연 운동과 그림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납득해 버렸다.
게다가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운다! 두 마리 모두 길냥이 출신으로, 이름은 '건'이와 '강'이. 합쳐서 '건강'이들이다. 강이는 첫째로 만두와 똑같은 치즈 코숏이고, 덩치가 작은 건이는 깜장색이 많이 섞인 삼색이다. 두 녀석 다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애교 덩어리들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고양이를 키우고. 취미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임 사람들과 카페에서 만나 각자 그림을 그린 후, 완성한 작품에 대해 설명하거나 칭찬, 보완해주고는 했다. 보통 네 명정도, 많으면 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데,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저녁에 술을 곁들여 놀기도 하며 친해졌다. 강은 거의 십 년간 요리사로 일을 하다가, 지금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퇴근 시간이 빠른 덕에 저녁 모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었다. 나 역시 카페 알바가 일찍 끝났기 때문에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다 보니 같이 얼굴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제주시로 이사한 기념으로 우리 집에서 집들이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집에 놀러 가기도 하며 친분을 쌓았다.
어느 날, 우리는 우연히 둘이서 밥을 먹게 되었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계속되는 연애의 실패 원인이 결혼, 그중에서도 육아에 있는데, 육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고. 결혼과 육아가 싫어서 연애를 끝내게 된다고. 강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라. 애초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연애를 시작하면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육아를 하냐 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뻔한 조언이었지만 그가 하는 말에는 무언가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쩐지 저런 사람과 함께 산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언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취향과 취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알고 보니 여러모로 나와 다른 점이 많았다. 분명 같은 24시간을 사용하는데, 그는 시간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쉬는 날에도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고양이를 돌보거나 산책을 시키고, 그림을 그리고 운동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바다를 보러 가거나 꼭 무언가 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나면 거의 밤 11시나 12시가 된다. 밤 8시 이후로 모든 활동을 종료하는 나로서는 다소 버거운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쉬지 않고 이곳저곳 나를 끌고 다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와 만난 이후로 불면증이 개선되고, 꿈도 거의 꾸지 않거나 꾸고 나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머리를 바닥에 대기만 하면 곯아떨어졌다. 전직 요리사였던 그는 나에게 밥을 먹이는 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매 끼 꼬박꼬박 챙겨 먹이고, 채소와 고기로 음식을 해주고, 같이 있지 않을 때에도 내가 뭔가를 먹었는지를 항상 체크한다. 그의 눈은 무언가를 할 생각에 항상 반짝거렸다. 미래 생각을 하면 죽음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와는 달리 그는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면 기운이 넘친다. 그의 영향인지 나도 조금씩 생산적인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걸 느꼈다. 조금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밤공기가 적당히 시원한 계절이 되었다. 우리는 저녁밥을 먹고 바로 앞 이호테우로 바람을 쐬러 자주 나갔다. 그는 캠핑에도 진심인 모양으로, 아주 편한 캠핑용 2인 의자와 접이식 테이블, 그리고 연기가 나지 않는 파란색 고체 연료 한 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원한 밤의 이호테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빨간 말등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굽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인디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를 먹으며 바다를 구경한다. 캄캄한 수평선은 반짝거리는 한치 배들이 일렬로 수를 놓았고, 밤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우리도 테이블을 펴고, 배달시킨 치킨을 먹으며 차가운 밤공기와 바다 냄새를 음미했다. 그는 다음에 사라봉 등산을 하자며 나를 꼬드긴다. 등산이 질색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언젠가는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함께 하고 함께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