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을까?
사기업 리크루팅은 꽤나 순조로웠다. 애초에 채용 자체가 적은 지금과 달리, 그때는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일단 기업들이 공채로 상당한 인원을 뽑기도 했다. 대부분의 은행에서는 서류에서부터 미끄러졌지만 (절친 S는 '형 인상이 무서워서 그래'라며 낄낄댔고 여자 친구 (현 와이프)는 '네가 통장이랑 카드 잘 팔 성격은 아니잖아?'라는 멘트로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원서를 낸 절반 이상의 기업에서 면접을 보았고 그런 경우 대부분 최종 면접까지 볼 수 있었다. 연극을 하면서 무대 경험을 많이 했기에 면접 시 별 긴장을 하지 않았고, 꼭 그 해 졸업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절박함에 실수할 일도 없어서 그런 것 같다.
S 증권사에서는 노래를 시키기에 별생각 없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This is the moment'를 열창했고, H 차에서 '붙여주면 다른 회사 갈 거 아니냐'는 질문에는 'KIA Tigers 팬입니다. 삼성 가면 맘 놓고 응원도 못하잖아요?'라고 넉살 좋게 대답했다. 영어 면접에서 Dream Car에 대해 물어보길래 'Flying car'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아마 면접관은 들으면서 기가 찼을 것이다. 그냥 페라리나 마이바흐라고 할걸...). 지금 생각해보면 좀 diplomatic 하게 준비된 대답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20대 중반의 치기 어린 솔직함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가고 싶었던 금융 공기업의 입행 시험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재무나 경영학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고 그럭 저럭 잘 답했던 반면, 제일 약했던 회계가 역시나 발목을 잡았다. 시험을 치면서도 '이건 쉽지 않겠다' 싶었기에 결과를 알았을 때의 충격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전에 CPA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시험 준비 기간도 7~8개월로 길지 않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탈락의 아쉬움은 생각보다 꽤나 오래갔다.
H 차, S 증권, S 증권, S 에너지 등등...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두 손에 찰 정도로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중에 내가 목표로 했던 곳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내린 결정은 에너지 공기업이었다. 살면서 자주 느끼는 점이지만, 치열하게 예측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 나중에 돌아보면 허망할 정도로 빗나가는 경우가 꽤나 있다. 2009년만 해도 별로 고민 없이 제외했던 H 차는 지금은 서울대생조차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 중 하나가 되었고, S 에너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신의 직장이다. 반면 내가 선택했던 회사는 '자원외교'의 첨병으로 잘 나갈 때도 있었지만, 해외 부실 자산 인수 등으로 2010년대 초중반 큰 시련을 겪었다.
그때 왜 나는 대기업이 아닌 에너지 공기업에 입사했을까? 일단 탈락한 금융 공기업에 대한 미련이 생각보다 꽤 컸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도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사기업에 가면 야근에 주말 출근도 많아서 이직이 어려울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공기업에 가면 내 시간을 활용해서 한번 더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설령 이직이 실패한다 해도 메이저급 공기업인 이곳라면 평생 다녀도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게다가 부모님의 결합과 재결별이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몇 년 간 겪어내면서 나도 모르게 '안정'에 대한 욕구가 커졌던 것 같다. 아무래도 공기업은 안정적인 평생직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