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콜라보 속에서 고통받던 이야기
2009년 11월, 짧은 오리엔테이션과 신입사원 연수를 거쳐 재무부서에 배치되었다. 내가 입사할 당시 원유, 천연가스 등의 원자재 가격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고 있었으며, 이에 MB 정권은 '자원 외교'를 내세우며 해외 유전이나 광구를 사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원유 가격이 배럴당 몇십 불 수준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조만간 배럴당 150~200불을 찍을 거라는 유명 투자은행의 보고서가 나오며 국가적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장 정부나 공공기관에 큰돈이 있는 건 아니니 은행 대출이나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돈을 끌어오는 재무부서의 회사 내 파워는 어마어마했다.
니 잘~나간다?
2일 차 사내 교육을 받으러 가는 나에게 C 팀장이 던진 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교육장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이는 교육이 6시에 끝났다고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퇴근하는 신입에 대한 고까움의 표현이었고, 이를 전해 들은 나는 교육이 끝난 뒤 사무실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이 퇴근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어야 했다.
사장의 총애를 받던 C는 내가 배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재무부서장으로 승진했고 이로 인해 부서 전체에 고통이 확대되었다. 지독한 워커홀릭이던 사장 못지않게 C도 퇴근이 늦었다. 평일은 무조건 9~10시까지 사무실에 앉아있었고 주말에도 꽤나 자주 출근했다. 본인 입으로는 '나는 야근 강요 안 해'라고 하지만, 저녁 10시에 부서 전체를 순시하며 "다들 열심히 하네! 보기 참 좋다 하하하" 따위의 멘트를 던지는데 누가 감히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을까? 성격도 급해서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고.
채권 발행을 위한 IB (투자은행) 관계자들의 미팅에서 연신 고함을 지르며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딜을 이끄는 걸 보며 '괜히 이 자리까지 올라간 건 아니구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이 사람이 조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가 없다. 일이 없을 때도 계속 대기해야 했기에 많은 부서원들이 만성 피로를 달고 살았고, 나뿐 아니라 몇몇 사람들도 인사팀에 퇴사 사유로 C의 야근 강요와 부적절한 언행 등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늘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강조했지만, 글쎄, 기독교인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지 않던가?
부서장 C가 불이라면 팀장 B는 얼음이었다. C가 부서장이 되면서 팀장 자리를 승계받은 그는 C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팀을 통제했다. 소리를 지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찌푸린 표정으로 조곤조곤 세세한 부분까지 잔소리를 할 때면 어느 팀원이건 진저리를 쳤다. 휴가를 올릴 때마다 왜 휴가를 쓰는지 꼬치꼬치 묻고 나서야 겨우 결재를 해 주었고, 사정이 있어 정시 퇴근을 하는 날이면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기에 대부분의 팀원들은 그 꼴을 보기 싫어 그가 퇴근할 때까지 앉아있었다. 언젠가 의미 없는 야근에 지쳐 시위하다시피 대놓고 사무실 의자에 누워서 웹툰을 정주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분명히 내 PC 화면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앉아만 있으면 오케이라는 걸까?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그때의 부조리를 생각하면 절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2010년 여름, 큰 규모의 채권 발행이 있어 바쁜 한 주를 보냈다. 다행히 내가 속한 외환/파생상품조는 주중에 할 일을 다 마쳤지만 채권발행조는 주말에 나와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토요일인가 일요일 오전,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B: 메일 안 봤어? 지금 어디야? 왜 안 나와?
- 나: 네? 팀장님, 지금 채권발행조 일만 남았잖아요. 제가 가도 도울 수 있는 일도 없고...
- B: 아 무슨 소리야... 나오라면 그냥 나와. 얼른 출근해! (뚝)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사무실까지 가는 한 시간 반 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탐장은 나의 인사를 받은 이후 밤늦게 퇴근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내가 해야 할 일도 도울 수 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오후 늦게 부서장 C가 잠깐 사무실에 들르며 "역시! 주말에도 고생하네"라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왜 불려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부서장 앞에서 주말 근무와 리더십을 자랑하고 싶은 팀장의 '병풍'이라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모든 공기업 관리자가 저 모양인 건 절대 아니며, 저 둘은 회사 내에서도 꽤나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다. 좋은 동료들과 일하면서 정시 퇴근하는 많은 동기들을 보며 역시 회사는 '부바부, 사바사' (부서 by 부서, 사람 by 사람)이라는 걸 직장 초년생 때부터 깨달아야 했다. 물론 야근 수당 따위는 당연히 없었기에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타며 박탈감에 입술을 깨문 것도 여러 차례다. 일은 정말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았으며, 팀장을 제외한 모든 팀원들은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