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미없어. 졸업이나 해야겠다'
4학년이 된 2009년 어느 봄날, 대학 생활은 영 재미가 없었다. 군대 가기 전 영혼을 다해 참여했던 연극 동아리는 동아리방도 빼앗기고 거의 해체 상태였고, 테니스야 칠 때는 재미있지만 그때뿐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재미없어. 졸업이나 해야겠다'
취업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뭘 해야 하지? 연초 한 달간 IT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을 하면서 컨설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IB (투자은행)는 워낙 근무강도에 대한 악명이 높기도 했거니와 내 학점이나 스펙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뜬금없이 고시를 준비할 것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남은 선택지는 공기업 혹은 대기업이었다.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2000년대 초반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선배들은 IB도 컨설팅도 안될 경우 어쩔 수 없이 가는 게 삼성전자 혹은 현대차였고 금융위기의 여진이 남아있는 2009년에 대기업은 선호되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반면 그때만 해도 꽤 많은 공기업들은 연봉과 복지 모두 대기업 못지않은 데다 정년도 보장되고 워라밸도 좋은 곳이 많아 '신의 직장',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이라 불렸다.
문득 선배 M이 떠올랐다. 나보다 훨씬 테니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고 늘 선하게 웃던 그 형. 09년 초의 졸업식에서 "그 신의 직장을 간 거야? 대단하네"라는 누군가의 말에 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의 모습이 기억났다. 사실 그때의 나는 해당 금융 공기업이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몰랐는데,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본 결과 행시와 더불어 최고의 입사 시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경영학으로 시험을 볼 경우 CPA (공인회계사) 1차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들이 출제되며 합격자들 중에 CPA가 많다는 이야기까지. 기가 좀 죽긴 했지만 '한번 해보지 뭐'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책 없는 결정을 내렸다.
TOEIC이나 MOUS (MS Office 사용능력 자격증) 등 사기업 취업에 필요한 스펙은 이전에 틈틈이 만들어 놓았기에 공부에 사용할 시간은 충분했다. 학교 커뮤니티 SNULIFE를 통해 두 명의 선배들과 스터디를 꾸렸고, 재무관리/회계/일반 경영학 세 개 과목의 진도를 정하고 매주 만나서 어려운 문제들의 풀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S는 공부를 오래 하기도 했고 워낙 똑똑했으며, J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 내공이 있었기에 필자는 그 둘의 페이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꽤 벅찼다. 평생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CPA 수험서를 들여다보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생각하며 머리를 부여잡은 게 몇 번이었는지.
도서관은 왠지 특유의 퀴퀴한 공기가 싫어 늘 지하의 테니스부 동아리방에서 공부했고, 그러다 보면 CPA를 준비하던 후배들이 와서 '형도 CPA 준비해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매일 테니스만 치던 인간이 무슨 바람이 불어 저러나 싶었으리라. 갑자기 '나 금융공기업 시험 준비해' 이러는 것도 왠지 부끄럽게 느껴져서 매번 적당히 받아넘겼던 기억이 난다.
여름이 되어 사기업들의 공채 공고가 여기저기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S와 J는 애초에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만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나는 어찌 되었건 올해 졸업할 생각이었기에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시간을 꽤 쏟아야 했다. 대학 생활은 누구와 비교해도 자신 있을 정도로 알차게 했다고 자부했지만 그걸 정해진 포맷에 담아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도대체 왜 신입사원 후보들에게 중역들이나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걸까? 내 성장 배경을 알아서 뭐하시려고? 이 질문으로 도대체 뭘 알아내고 싶은 거지? 빈칸을 채워나가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3천 자 이상의 답변을 요구한 질문이나 아예 전체 질문란에 복사&붙여 넣기를 막아놓은 지원 사이트를 본 이후론 더 이상 불평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중, 교내에 걸린 한 에너지 공기업의 채용 플래카드를 보게 되었다. 그걸 본 S는 '굳이 왜? 붙으면 저기 갈 거냐?'라며 마뜩잖아했지만 '우리 목표로 하는 곳 모의고사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냐'라는 나의 설득에 결국 같이 입사 지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실제로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주관식이 핵심인 금융 공기업 시험들과는 달리 문제가 대부분 객관식이었고, 시험을 보는 와중에도 S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