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현실이 더 농담같을 때가 있지요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겠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도 직원들의 동기 부여가 큰 숙제였다.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정년이 보장되고,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금전적 보상에 아주 큰 차이가 없는 공공기관의 특성 상 직원들이 크게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은 승진, 해외 사무소 파견, 유학 정도다. 사실 승진은 특출나게 뛰어나지 않은 이상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하기 때문에 (물론 팀장/부서장 레벨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젊은 직원에게는 유학, 차/과장 급에서는 해외 사무소 파견 정도가 직원들의 자극제로 활용되곤 했다.
조사연구가 핵심 역량인 조직의 특성 때문인지 회사는 매년 수십명의 인원을 선정하여 유학을 보냈다. 과거에는 해외문물을 접할 수 있는 해외 유학이 높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나, 요즘 들어서는 해외 여행도 쉽고 맞벌이 부부가 많아서인지 오히려 국내 유학의 경쟁률이 압도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학 박사인데, 아무래도 계량 모델을 돌리는 등의 난이도 높은 업무를 위해선 박사학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리라. 회사가 원하는만큼 외부에서 경제학 박사를 데려올 수는 없을 테니 내부 육성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물론 경제학 박사 뿐 아니라 MBA, 정책학, 금융공학, 법학, 전산학 등 다양한 학위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지만 선발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학 대상자 선정에는 소속 부서, 연차, 영어 시험 점수, 인사고과, 사내 논문 입상 실적 등의 다양한 요소가 고려된다. 지원서 접수야 기본 요건만 맞추면 (고과 상위 50%) 누구나 가능했지만, 선발을 위해 간추려진 최종 후보들의 스펙은 아무래도 다들 굉장히 좋기 마련이고, 결국 '얘 괜찮다더라', '이 친구가 성격도 좋고 열심이라던데'라는 정성적 평가가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꽤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유학을 노리는 직원들은 업무 뿐 아니라 다양한 사내 활동을 하며 인맥을 쌓고 평판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사내 테니스부였다. 아니, 선택했다기 보다는 전 총무였던 대학교 선배 M이 지방 발령이 나자 나에게 감투를 넘긴 것에 가까웠다. 테니스부 총무는 서글서글한 성격과 테니스 실력이 필수적이다. 나름 대학교에서 5년 넘게 테니스를 치긴 했지만 농담으로라도 내가 테니스 고수라고 하기는 어려웠기에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총무의 업무는 일견 간단했다. 일년에 두 차례 있는 회사 내 테니스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날짜를 정하고, 참석자들에게 제공할 물품을 구매하고, 급여팀과 지원을 협의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한다. 제일 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참석 인원이었다. 최소 50명에서 심할 경우 세자릿수까지 참석하는데다 가끔씩 사장 등 거물급들도 얼굴을 비추다 보니 코트 예약 및 식당 예약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옛날이야 서울이나 근교에 10면 이상의 코트를 가진 테니스장들이 많았지만, 테니스 인구의 감소로 큰 테니스장들이 많이 문을 닫으면서 주말 예약을 잡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다. 콧대가 높아진 코트 담당자들과의 relationship을 관리하기 위해 대회 후 피자나 다과를 배달시킨 적도 있고, 공문을 보내야만 예약을 해준다는 담당자가 있을 경우 팀장의 눈치를 보며 문서를 작성해서 보내기도 했다.
식당 예약에 대해서는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이를 가는 에피소드로 대신하고자 한다. 사내 테니스부 고문인 S 국장은 의전의 대가였다. 사장을 보필할 때 분 단위의 스케줄 표 (ex. 9:37 회사 도착, 9:51 인사 A 면담) 를 제공하여 사장의 큰 신임을 받아 탄탄대로를 걸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의전을 위해서는 윗 사람들의 의중을 파악하여 먼저 움직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렇기에 테니스 대회를 준비할 때도 그는 언제나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높은 이들이 보기에 문제의 소지가 없는지 따져서 나를 힘들게 했다.
사내 테니스 대회를 앞두고 햄에 들어간 첨가제가 몸에 해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서 며칠간 나왔다.이를 본 S 국장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조사역, 식당에 연락해서 햄 들어간 건 다 빼라고 해.
문제는 그곳의 주력 메뉴가 부대찌개라는 것이다. 당연히 식당에서는 "아니, 부대찌개에서 햄이 빠지면 무슨 맛이 납니까?" 어이없어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요청하는 나도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는데 사장님의 기분은 어땠을까? 사장님 미안해요. 나도 까라니까 까는 거예요...
결국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식당을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코트 근처에 수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거의 없었기에 며칠간 그 일대를 샅샅히 뒤져야 했다. 하필 팀도 상당히 바쁠 시기라 어쩔 수 없이 야근 후 남들이 집에 갈 때에야 식당 검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 고요한 사무실에 남아 인터넷을 뒤지고 식당에 전화를 걸면서 단체 예약이 가능한지 묻다 보면 '유학이 뭐라고 이런 광대놀음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아무리 안되면 되게 하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