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을 뺏겨도 괜찮다고 말한 이유

과부 팔자는 과부가 안다

by Sol Kim

태민이가 사춘기 문턱에 들어서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금씩 변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애가 크는 건가? 호르몬 때문인가?”를 되뇌는 하루하루들. 특히 최근 부쩍 낯선 행동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결국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와의 annual checkup을 급하게 앞당겨 이번 주에 뉴욕에 있는 Columbia University Irving Medical Center를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뉴욕 병원까지의 거리가 서울-부산 거리보다 훨씬 멀다 보니 퇴근하자마자 거의 5시간을 운전해 뉴욕으로 올라가서 밤늦게 눈을 붙이고, 다음날 오전엔 원격 회의를 몰아서 처리한 뒤 오후에 진료를 보고 다시 5시간 가까이 운전해 돌아오는 고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하다못해 진료가 월요일 혹은 금요일이면 좀 여유 있게 움직일 수 있으련만, 이 의사 선생님은 수요일에만 진료를 보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뉴욕까지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동네 근처의 “유명한” 병원들은 대기 기간이 기본 몇 달에서 몇 년이고, 무엇보다 지금 진료를 보는 Dr. Bain에 대한 아내의 신뢰가 매우 깊다. 아이를 맡긴다는 건 결국 ‘의사의 실력’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판단을 믿고 내 불안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걸 우리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배웠다.


수요일 오후, 대략 10평 남짓의 크지 않은 대기실에 서로 다른 사연들이 한꺼번에 앉아 있다. “쟤가 왜 여기 왔지?” 싶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아이도 있고, 정신과 육체 양쪽 모두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아이도 있다. 어떤 아이는 그날따라 기분이 너무 좋아 우당탕탕 뛰어다니고, 어떤 아이는 기분이 바닥이라 꽥꽥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지금 이 것이 단순히 “버릇”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약간의 찌푸림과 투덜거림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알기에.


그날 태민이는 짜증을 조금 내다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키가 자기 반도 안 되는 흑인 꼬맹이와 대기실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늘은 괜찮은 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금발의 꼬마가 다가오더니 태민이가 쥐고 있던 센서리 장난감을 휙 낚아채서 뛰어가 버린다. 태민이의 표정이 굳었고, 나도 다시 장난감을 받아오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내가 아이 엄마를 향해 잽싸게 말했다.


“We are okay. We have plenty.”


상대 엄마는 놀란 얼굴로, 동시에 안도한 얼굴로 대답했다. “Are you sure? Okay… thank you.” 그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따라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태민이는 원래도 다른 아이의 침해나 폭력에 대해 즉각 대응하지 못하는 편이다. 여기서까지 양보를 학습시키면, 나중엔 자기의 정당한 권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아이가 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내의 시선은 달랐다.


“태민이는 이제 공유할 줄 아는 아이야. 그런데 저 아이는… 엄마가 너무 힘든 단계인 게 보이잖아.”


내가 장난감과 상대 아이의 무례를 볼 때, 아내는 그 아이의 수준과 엄마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저거 하나 때문에 엄마의 오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어지면 그걸로 됐어. 우리는 괜찮잖아.”


물론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권리를 지키는 연습도 중요하고 공유하는 경험도 중요하다. 다만 아내는 ABA 전문가이자 10년 넘게 엄마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짧은 순간에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태민이가 이미 한 걸음 성장해 있는 지점과 다른 누군가가 아직 올라오지 못한 계단의 높이를.


'과부 팔자는 과부가 안다'라고 했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나도 주변을 같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힘든 시간이 나의 양보로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다면 그 무게를 흔쾌히 나눠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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