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이라는 이름의 허락

by Sol Kim

** 이 글은 RBT (Registered Behavioral Technician)로 일하고 있는 와이프가 작성하였습니다


태민이는 18개월부터 다른 아이들과 좀 달랐다. 낯선 장소에 가기만 하면 엄청나게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명절에 시댁에 방문하면 기껏해야 한두 시간 버틸 수도 없었고, 평소에 산책도 항상 정해진 길로만 가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좋아하다 못해 보이는 모든 엘리베이터를 전부 다, 그것도 순서를 지켜서 타야 했다.

태민이가 30개월쯤 되어 시어머니랑 식사를 하던 중 어머님이 넌지시 말씀하셨다. "뭔가 다른 것 같아. 소아정신과 한번 가보는 건 어떻겠니?"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바로 동네 소아정신과를 방문했었고 의사는 말했다. "아직 어려서 진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언어치료 및 놀이치료를 바로 시작해야 해요. 하지만 예후는 좋을 거니까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나는 필요한 부분만 들었다. 아직 어리다. 예후는 좋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태민이가 만 4세가 되던 해 남편은 회사에서 파견하는 미국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태민이가 미국에서 다닐 프리스쿨에서 요청한 서류 작성을 의사 선생님께 부탁드렸는데 서류에 이런 단어가 적혀 있었다.


Autism (자폐)


너무 놀라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바로 다시 들어가서 선생님에게 왜 이런 단어를 쓰셨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한 달 동안 아이를 진료하면서 확신이 생겼다고, 이 단어 외에는 아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병원을 나오는 길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강남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한국에서 제일 유명하신 소아정신과 선생님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라야 2년 이후에나 차례가 올 거라고 했다. 그래, 유학이 2년 걸리니 딱 미국에서 돌아올 타이밍이네. 이 진단이 틀린 것을 증명하고 말리라 생각하며 바로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남편의 대학이 위치한 Texas Austin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아과 의사를 만났다. 한국 진단서를 내밀었더니 의사는 아이를 보고, 서류를 보고, 나를 봤다.


"자폐 맞습니다. 지금 치료 시작해도 빠른 게 아니에요."

의사가 소개해준 아동발달 전문 병원에 전화를 했다. 해야 할 말을 대본처럼 하나하나 적어서, 더듬더듬 통화를 마쳤다. 초진 대기가 1년 반이라고 했다. 미국에 2년밖에 없는데 1년 반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자 한국에서 받았던 각종 치료들을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치료 상담 중 알게 되었던 것은, 미국 자폐 진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진단서로 많은 치료들이 보험 커버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진단서가 없었다면? 보험 없이 사비로 그 비싼 치료들을 받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결국 1년 반의 귀한 시간을 검사와 진단을 기다리며 낭비했을 것이다. 그토록 원망했던 종합병원 선생님은 사실 큰 은인이었다.



미국 Virginia로 이사를 한 후 RBT (Registered Behavioral Technician) 자격증을 따고 ABA 센터에서 일한 지 2년이 넘었다. 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어린아이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된다. 놀랍게도 만 2세, 심지어 18개월짜리들도 자폐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한다.


진단은 허락이다. 누군가 공식적으로 "이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선언해야 치료가 시작된다.

가끔은 생각한다. 진단이라는 이름의 허락이 1~2년만 더 빨랐다면, 태민이의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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