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들를 때마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뭐 하러 나가서 고생하냐... 요새 한국도 얼마나 좋아졌는데."
재작년 늦가을, 몇 년 만에 외가 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근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잘 마친 태민이는 소파 구석에 앉아 자기가 좋아하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늘 그러듯 혼자 낄낄거리고, 손을 비비고, 그러다 또 폰에 집중한다.
식사가 끝날 무렵 작은 삼촌이 말씀하셨다.
"자폐란 얘기를 듣고 와서 그렇지, 몇 년 만에 실제로 보니까 전혀 모르겠어.
요새 애들 공공장소에서 얼마나 난리인 줄 알아? 얘는 얌전한 거야."
두 어른의 진심이 담긴 말에, 그 속에 숨은 격려와 안타까움을 알면서도 속으로 삼켰던 말은 따로 있다.
지금 보시는 건 태민이가 행복한 순간이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니까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이 말들을 꺼내지 않았다.
한국이 많이 바뀌었다는 건 사실이다. 제도도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갔을 때 피부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 또한 내가 떠났던 10년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태민이가 정말 힘든 순간은 여행이 아니라 일상에 있다. 학교에서 하기 싫은 수업을 버텨야 할 때, 예고 없이 계획이 바뀔 때, 짓궂은 또래들을 견뎌야 할 때. 2주짜리 여행에서 보이는 모습은, 미리 짜인 동선과 줄여놓은 변수 안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는 태민이다. 그래서 괜찮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남은 50주의 일상은 다르다. 나와 아내가 태민이의 모든 일상에 개입할 순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스스로 버티는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가 매일 애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두 어른들의 말이 고맙고도 아프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아니까.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아니까. 실제로 한국이 많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니까. 다만 한 번쯤은 생각해줬으면 한다. '이 정도면 괜찮'은 모습이 긍정적인 환경에서 자랐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저 평안한 웃음 아래엔 셀 수 없는 연습과 기다림과 눈물과 돈과 시간이 쌓여 있다는 것을.
식당을 나오면서 태민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늘 잘했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