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조건

좋은 배우란 어떤 사람일까?

by Sol Kim

‘배우’ 혹은 ‘연기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희고 조막만한 얼굴, S라인 몸매, 훤칠한 키, 예민함, 밝고 외향적인 성격 등등. 물론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배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배우란 뭔가 나랑 관계없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일 것이다.


필자의 학창 시절 연극반 활동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이유도 필자의 외모가 이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물론 필자에게도 배우로서의 강점이 있는데, 얼굴 면적이 넓은 배우가 표정연기까지 잘 될 경우 객석 뒤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자기 연기를 잘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건 아무래도 극회 선배들의 위로였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연극 동아리 활동 덕분에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고, 평생 즐길 수 있는 관극(觀劇)이라는 취미도 생겼으며, 인간관계에 대한 교훈도 꽤나 얻었으니 이는 큰 복이었다.


이때 얽히고설킨 인연 때문인지 주변에 공연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꽤 있다. 극회 선배 중 한 사람은 방송사에서 촉망받는 PD로 잘 나가고 있고, 다른 선배는 대학로에서 이름을 날리는 중견 연출가로 활동하며 단단한 입지를 구축한지 오래다. 또한 현재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거나 데뷔를 꿈꾸는 지인들도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만 대여섯이다. 하지만 필자와 가장 친한 배우를 꼽으라면 현재 탤런트로 활동 중인 한 살 아래 친동생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수려한 외모로 동네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던 녀석은, 갑자기 연기를 하겠다면서 몇 달 연기학원을 다니더니 최고의 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하고, 그냥 한번 해보는 거라던 지상파 공채 탤런트 모집에 떡하니 붙어버림으로써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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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란 무엇일까? 글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 후 그 유명세를 타고 단번에 공중파 황금시간대 드라마 주연에 캐스팅된 약관의 소년이든, 만원사례 (가난한 극단의 경우 소극장에 만원 관객이 들 경우 기념으로 배우 및 스태프들에게 만원씩 지급하는 것)에 기뻐하며 대학로에서 집에 가는 막차에 오른 십 수 년차 무명소졸이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긴장 속에 첫 아마추어 무대에 오른 대학생이든 모두 ‘배우’다. '배우는 A다 (혹은 B다)'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를 정의하기 어렵다면, 좋은 배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십몇 년 전 어느 연습 시간에 극회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얘들아, 배우는 계속 배워야 돼". 이는 당연히 기계적으로 주입되는 죽은 지식 및 기술의 습득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 것이다. 최대한 많은 노력과 연습, 도전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이를 자신의 연기의 발전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어 단지 대본만 가지고도 연출가가 원하는 감정과 연기를 압도적으로 표현해 내는 경우도 있으며, 타고난 외모가 출중하여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화면이 꽉 차는 듯한 존재감을 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일 뿐이다. 이런 ‘가진 자’들을 질시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태도가 결국 그 배우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에서 주인공에 반하는 악당인 ‘조커’를 기가 막히게 연기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배우 히스 레져 (Heath ledger)를 떠올려 보자. 과연 그가 타고난 사이코패스였기에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우울 및 광기를 활용하여 그런 신들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가 우울증을 앓았기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조금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좀 더 나은 캐릭터 창조를 위해 매일 세상에 대한 원망을 빼곡히 적어나가며 극 중 조커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극 중 인물의 감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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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또한 배우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타고난 오성이 뛰어나고 노력을 더해 출중한 실력을 갖추게 된다 하더라도, 모놀로그 (일인극)을 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과의 호흡을 맞추면서 극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설령 상대 배우의 실력이 본인보다 떨어지거나, 연출과 본인의 해석이 다르거나, 혹여나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떤 상황이든 상대와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배우가 영원히 신경 써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대학교 3학년인 2006년에 극회 춘계 공연의 연출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 한창 영화 ‘왕의 남자’가 장안의 화제였기에 그 바람을 타고 우리도 영화의 원작 대본 ‘이(爾)’를 선택하여 공연을 준비했다. 영화보다 훨씬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대본인 데다가 노출 및 폭력장면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어서 공연 준비가 쉽지만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배우들 간의 접촉이었다. 아무리 ‘부부이니 부드럽고 편안하게 껴안아봐’, ‘연인끼리의 포옹 장면이니 좀 더 애정이 느껴지게’라는 주문을 반복해도 도무지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뻣뻣한 팔, 어색한 손, 포옹하는 중에 서로 떨어져 있는 상체 등등. 지금 돌이켜 보면 배우 간 충분한 대화와 공감, 친밀감 형성 등을 통한 ice-breaking이 선행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배우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려는 노력도 중요하긴 하지만, 필자가 연출로서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데 더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다. 극의 해석이 아니라 극을 만드는 사람들 간의 마음의 벽을 먼저 신경 썼다면 훨씬 나은 공연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공연 후의 갈등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늦든 빠르든 우리 모두는 사회로 나가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role)을 맡아 활동 (act/play) 하는 것인 만큼, 좋은 배우의 조건은 좋은 동료 혹은 친구의 조건과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다. 지금 내 역할이 중요한가? 그럴지도 혹은 아닐지도. 다만 지금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 작게는 이 직장, 크게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배움과 소통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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