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꽃미남탕'을 보고 얻은 교훈
어릴 때 아버지 친구 모임에 따라가면 사장, 교수, 선생, 박사 등 수많은 호칭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름도 알고 서로 친한데 굳이 왜 저런 거추장스러운 걸 붙이나?' 나이를 더 먹은 지금이야 왜 다들 이에 민감한지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살면서 배운 교훈이 하나 있다면 타이틀보다는 본질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겉은 번지르르한데 내실이 없는 사람이나 조직이 얼마나 많던지.
2014년 어느 여름날, 갑자기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니 보러 오란다. SBS에서 탤런트 데뷔 후 방송만 4년 가까이해서 연극은 아예 접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세 달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단다. 연극 배우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실을 나보다 훨씬 잘 아는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방송의 화려함에 길들여졌을 텐데 상대적으로 초라한 대학로 소극장에서 과연 만족할 수 있을는지 솔직히 기대보다는 우려가 훨씬 컸다. 결정적으로, 동생이 카톡으로 보낸 공연 포스터를 본 순간 ‘어이구야..’하는 탄식이 입에서 절로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연극 제목이 꽃미남탕이 뭐냐...
설령 공연이 아무리 재미있고 내용이 좋아도 타이틀이 이리 낯부끄러워서 어디 지인들에게 추천이나 하겠나. 20대 초반 여자들 말고는 어디 누가 보러 오겠나.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쩔 수 없이 배우 가족의 의무인 ‘강제 문화행사’에 동원되어 퇴근 후 와이프와 함께 대학로 달빛극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100석도 안 되는 조그만 극장에, 극장에 없는 좌석 번호를 티켓에 적어주는 어리바리한 스태프까지. 참 갈수록 가관이다. 애초부터 크게 없던 기대감은 아예 사라지고 공연시간에 졸지만 않기를 기원하며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공연 시작 전 안내부터 심상치 않다. 멀티맨 (공연에서 등장하는 여러 단역들을 혼자 소화하는 배우)이 등장하여 관객들에게 툭툭 개그를 던지며 살짝 경직되어 있던 객석의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더니, 잘생긴 총각들이 한 명 두 명 나와 극을 풀어나가는데 연기를 맛깔나게 잘해나간다. 물론 가끔 극이 늘어지기도 하고 웃음을 위한 노골적인 오버액션으로 불편했던 장면도 있었지만, 연극의 타이틀만 보고 들었던 ‘20대 초반의 여자 관객만 노리고 자극적인 제목과 잘생긴 배우들을 버무려서 대충 만들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은 기분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주인공인 ‘만용’은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귀국한다. 가정을 등한시하고 목욕탕 사업에만 매진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만용은 그토록 싫어했던 몇 평 남짓의 목욕탕을 얼른 팔아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목욕탕을 담보로 빌린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두닦이 출신 조폭 ‘다스’, 다스가 짝사랑하는 다방종업원 ‘리지’, 극소심한 왕따 이발사 ‘명달’과 함께 목욕탕을 '꽃미남탕'으로 리모델링하여 열심히 운영하게 된다.
극 중에서 만용이 술에 취해 말한 것처럼 목욕탕은 “깨끗해지는 곳이자 벗겨낸 때들이 모이는 가장 더러운 곳”이다. 다스와 리지, 명달에게 목욕탕은 과거의 자신을 벗어나 각자의 장점과 가치를 살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자 소중한 아지트이지만 만용에게는 지긋지긋하여 벗어버리고 싶은 더러운 곳이자 족쇄일 뿐. 만용의 대사에서 우리는 “꽃미남탕”의 대박 속에 가라앉아 있는 필연적인 갈등의 전조를 읽어낼 수 있다. 결국 각종 오해와 실언 그리고 음모가 겹치며 목욕탕은 매각 위기에 처하게 되고, 눈이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해 목욕탕을 구하겠다는 명달을 찾기 위해 만용과 다스는 조폭 사무실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리지는 만용 부친의 숨겨진 진심이 담긴 일기장을 만용에게 전달하게 되고, 만용의 얼어붙은 마음도 결국 녹아내리며 위기는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90분간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며, 아직도 제목만 보고 지레짐작하려는 성급한 모습이 나에게 남아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출연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 공연을 보러 왔을까? 그동안 제목만 보고 넘겨버린 놓쳐버린 좋은 연극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신나게 웃다 보니 순식간에 끝나버린 공연을 아쉬워하며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이런 것도 공연을 보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