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파리넬리'를 보고
카스트라토 (Castrato)는 ‘거세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castrare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변성기가 되기 전에 거세를 해서 성인이 된 후에도 여성의 음역을 내는 ‘남성 소프라노’를 의미한다. 큰 체구로 인해 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동시에 변성기를 겪지 않아 여성의 높은 음역까지 가능하기에 뛰어난 카스트라토들은 ‘천사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한때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 금기시 되었는데, 이때 카스트라토들은 여성의 배역까지 수행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비록 20세기 들어 시술의 비인간성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해당 시술이 금지되어 현재 카스트라토들은 존재하지 않으나, 훈련을 통해 여성의 고음을 내는 카운터테너 (counter tenor)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관객들을 매혹하며 사라진 그들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한다.
카스트라토 대부분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생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거세를 하였으나 음악적으로 성공하여 큰 부와 명예를 얻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뮤지컬 ‘파리넬리(Farinelli)’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카스트라토인 ‘카를로 브로스키’의 인생을 모티브로 한 공연이다. 주인공 배역이 카스트라토인 극 특성상 어지간한 배우는 역할을 맡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카운터테너 성악가인 루이스 초이 및 락밴드 ‘플라워’의 보컬 출신 고유진이 파리넬리 역할을 맡는다고 하여 큰 기대 속에 예매를 마쳤다.
극은 세도가 파리넬로 가문을 위한 성악가가 필요하다는 주교의 협박으로 시작된다. 큰아들의 작곡 공부를 지원하겠다는 주교의 회유에 ‘한 아들을 위해 다른 아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아버지는 저항하지만, 큰아들 리카르도는 자신이 동생을 끝까지 지키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국 동생 카를로를 수술 장소인 이발소로 데려가게 된다.
“머리를 자르면 인상이 바뀌고, 거기를 자르면 인생이 바뀌죠”라는 노골적인 가사가 나타내듯 이발소는 죽음과 재탄생을 상징하는 곳이다. 붉은 조명에 번쩍이는 가위와 시술용 칼을 든 이발사들의 섬뜩한 군무와 요염한 움직임. 거세의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극은 조명, 음악, 안무를 통해 시술 대상자의 공포와 슬픔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관객은 시선을 뗄수 없는 동시에 이 장면이 빨리 끝났으면 싶는 양가적인 감정에 당황하게 된다.
카스트라토 파리넬리로 재탄생한 카를로는 이후 승승장구하여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부와 명예를 휩쓴다. 각국에서 쏟아지는 공연 요청과 귀족들의 초대장, 돈과 여자까지. 형 리카르도는 이 일상이 즐겁기만 한데, 정작 파리넬리는 기교 잔뜩 부린 노래만 부르는 일상에 지쳐 간다.
음악학교 시절 단짝 친구인 안젤로는 파리넬리를 대 음악가 헨델이 있는 자신의 극단으로 초대하지만, 형 리카르도는 그녀의 초청장을 찢어버리고 헨델의 라이벌인 왕실극단과 전속계약을 맺고 만다. 계약이야 어찌됐던 관심없는 파리넬리는 신이 나서 안젤로를 찾아나서지만, 파리넬리의 계약 소식을 들은 안젤로는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며 차갑게 돌아선다. 이 와중에 왕실극단과 안젤로 소속 극단의 오페라 대결이 벌어지게 되고, 진 쪽은 런던의 음악계에서 밀려나버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
파리넬리는 형 리카르도에게 불같은 분노를 퍼붓지만, 리카르도는 ‘이번에는 꼭 최고의 오페라를 완성하겠다’는 말로 간신히 동생의 분노를 잠재운다. 하지만 며칠밤을 꼬박 새워 완성한 오페라는 ‘형의 악보는 언제나 똑같다’라는 단호한 동생의 거절과 함께 버려지게 되고, 절망한 리카르도는 헨델이 최근에 완성한 오페라 ‘리날도’의 악보를 훔쳐내어 파리넬리에게 자신의 것인 양 건넨다. 하지만 파리넬리는 대번에 이 악보가 헨델의 것임을 알아보고 형에게 다시 한번 실망한다.
결국 동일한 오페라를 두 극단이 동시에 공연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진행된다. 당연히 왕실극단은 최고의 가수인 파리넬리를 보유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심지어 극단주는 더욱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헨델 극단의 주연 카스트라토에게 뇌물을 주어 공연 당일 극장에 나타나지 않도록 손을 쓰기까지 한다. 주연 배우가 사라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안젤로는 사라진 카스트라토 대신 무대에 서야 한다. 이 공연을 실패할 경우 벌어질 온갖 일들을 떠올리며 두려워하는 안젤로의 뒤에서 조용히 나타난 파리넬리. 그는 안젤로를 한번 꼭 끌어안은 뒤 그녀의 의상을 대신 입고 무대에 올라간다. 이 장면에서 불리는 명곡 ‘울게하소서(Lascia Ch’io pianga)’
슬픔 내안에 눈물만 흘러
내 맘 아프게 날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la cruda sorte!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Il duolo infranga queste ritorte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dei' miei martiri sol per pieta!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형과의 애증과 갈등, 안젤로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공연이 끝나면 다가올 파멸 등 복합적인 상황과 노래의 애절한 선율, 섬세한 가사가 어우러져 수많은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이 장면은 진정 극의 하이라이트다.
이 공연은 등장 인물들의 관계 및 갈등을 보여주는 데 많이 치중하였고, 극의 전개 부분이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전반적인 곡의 느낌,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무대 및 조명의 사용 모두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볼 생각이 있을 정도로 괜찮은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