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할머니의 친절
2020년 봄에 시작된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집에서 가장 힘들어진 것은 아내였다. 이전에 아이가 학교에 가면 잠깐 낮잠도 자고 공부도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던 아내는, 팬데믹으로 인해 학교 문을 닫고 Virtual learning을 하게 되자 아이 옆에 앉아 수업에 집중시키고 각종 숙제를 같이 하느라 '얘가 수업을 받는지 내가 받는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하곤 했다. 필자가 봐도 하기 싫다고 소리 지르고 딴청 피우는 아이를 혼내고 어르고 달래 가면서 수업을 받게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일하는 게 낫지
가을이 되어 태민이의 학교 오픈이 확정되면서 교실에 보낼 준비물을 사야 했다. 어지간한 것들은 쉽게 구했으나 유인물을 수납할 큰 폴더는 찾기 어려웠고, 아마존이나 동네 마트를 뒤져도 마땅한 옵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대형 문구점인 'Office Depot"에 들르게 되었다.
자폐인들에게 루틴 (routine)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그들이 예상치 못한 변화나 새로운 자극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 부부는 평소에 들르지 않는 곳을 아이와 갈 경우 미리 태민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방문 시간과 이유를 말해주곤 한다. 원래 태민이의 루틴은 치료실 방문 후 곧장 집에 가거나 놀이터에서 잠시 노는 것이었으나, 그날따라 집에 가는 길에 Office Depot가 보여서 바로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태민이는 상점에 가는 것을 좋아하니 이번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불행히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태민이는 잔뜩 화가 났다. 온 매장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고, 자기가 기분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필자 부부의 화를 돋우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심한 반응에 당황하긴 했지만 왜 이러는지 짐작도 갔기에, 최대한 아이를 달래면서 빨리 쇼핑을 끝내고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 온 매장이어서 그런지 사야 할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이는 계속 난리를 피우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어떻게 어떻게 폴더 3개를 카트에 담고 나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 날 따라 줄은 왜 이렇게 긴 건지. 팬데믹 때문에 계산대에는 고작 직원 한 명밖에 없었고 줄은 한없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당연히 아이의 기분은 점점 나빠졌고, 결국 매장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배경음악도 없는 적막한 매장에서 말이다.
아이고 맙소사. 빨리 노래를 중단시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어디 내 맘대로 되던가. 조용히 시키려고 애를 먹고 있을 때 뒤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이런 말이 들려왔다. “너 정말 노래 잘한다! 듣기 좋은걸?”. 다급히 사과를 하고 아이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미안해할 거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아이 노래를 들으니 기분이 즐거워졌는걸요. 얘야 혹시 한 곡 더 불러줄 수 있니?”라고 말하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마 아이가 어리니 우리가 이해해주자는 눈빛이었으리라. 너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그저 “Thank you so much”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태민이는 우리 순서가 올 때까지 노래를 세 곡이나 불렀고, 할머니는 알아듣지도 못할 그 노래들을 - 한국 동요였으니까 - 아이와 눈을 마주쳐 가며 끝까지 진지하게 들었다.
우리 아이의 자폐를 눈치 채신 것이었는지 아니면 노인 특유의 아이에 대한 호의였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게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이가 말썽을 부릴 때 주변의 눈총과 수군거림 외에는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의외의 한마디가 너무나도 놀랍고 감사히 다가왔다. 설령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감격이 더 했을까?
필자도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