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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Apr 14. 2021

식기세척기, 그리고 미국의 엄청난 서비스 정신

익숙해지는 날이 오긴 할까?

미국에서 살다 보면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한국에서는 전화 한통이면 쉽게 해결될 일들이 미국에서는 장기간의 두통거리가 될 때가 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비스를 받을 때가 그러한데, 한국에서는 짧게는 한두시간, 길어도 하루 이틀 기다리면 해결될 일들이 미국에서는 며칠이나 몇주 걸리는 일이 허다하다. 한국에선 30분이면 끝나는 은행 계좌 개설도 여기서는 한두시간이 기본이고, 이사 후 인터넷을 신청하고 출장기사를 요청하면 그 주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폭우나 폭설, 토네이도 등 자연재해가 덮치면 전기, 가스, 인터넷 등이 몇시간씩 끊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며, 운이 나쁜 경우 며칠간 그 상태로 버텨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도 한국처럼 다음날 기사가 찾아오는걸 기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민간 서비스가 이정도라면 공공 서비스는 어느정도일지 짐작이 가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공무원 및 공공기관의 매너리즘과 불친절에 대해 불평하지만,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한국 공무원들은 그정도면 일 잘하는거야!'라며 입을 모아 한국의 공공행정을 칭찬한다. 그만큼 이곳에서 체감하는 공공행정 및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이야기인데, 특히 면허증 발급이나 갱신을 위해 찾아가야 하는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차량 등록 및 면허증 관리 등을 하는 기관)의 경우 일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두세번씩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아무리 꼼꼼하게 서류를 챙겨간다 해도 그날 만난 담당자가 '이거로는 안돼', '난 이거 몰라'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규정을 숙지하지 못한 경우 이런 일이 꽤나 자주 일어난다). 이럴 때는 그 담당자와 싸워 봐야 별 이득이 없고, 그냥 한숨 한번 푹 쉬고 다른 날 예약을 잡는게 낫다. 정말 내 서류에 문제가 없다면 아마 다음 담당자 (운이 나쁘면 다다음 담당자)는 승인해줄 테니 말이다.


애니메이션 Zootopia에서는 DMV 직원을 나무늘보로 묘사한다. 미국 사람들에게도 DMV는 답답함의 대명사인 모양이다.






약 4년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나름 이곳의 서비스에 단련된 우리도 가끔씩 머리 끝까지 화가 날 때가 있는데, 최근 겪은 식기세척기 이슈도 그 중 하나이다. 


(1주: 발단)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집주인이 수익용으로 사들인 것이며, 계속 렌트만 주는 집이기에 가끔씩 가전제품이 고장나더라도 교체하기보다는 수리기사를 불러서 해결해주곤 한다. 어느 날 식기세척기가 고장이 났고, 수리 기사가 와서는 '배수 문제네. 부품 주문해줄테니 너희 집에 부품 오면 다시 예약 잡아'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오케이. 이런 거야 살다보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2주: 전개) 한주가 지나 부품이 도착했고, 전화해서 그주 수요일날 예약을 잡았다. 수요일 오후, 기사가 온다는 시간이 지나 두어 번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다음이 너희 집이야', '한시간 쯤 뒤에 갈거야'고 하더니 결국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다음날 아침에 서비스 회사로 전화를 걸었지만, 담당자는 수리기사가 Family Emergency가 있었다며 그 주 토요일로 예약을 잡아 주겠다고 했다. 아니, 그러면 못온다고 전화라도 한통 했어야지? 솔직히 핑계같았지만 국에서 Family Emergency는 모든 추궁을 막을 수 있는 마법의 방패나 마찬가지기에 어쩔수 없이 알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 주 토요일 오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 기사가 방문 15분 전 전화를 걸어 방문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에 '이제 오려나 보다' 싶어 반갑게 전화를 받았지만 그는 '오늘도 못 간다'고 하며 다음주 월요일날 오겠다고 했다. 이날은 심지어 별다른 핑계도 없이 그냥 못간다는 말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고, 집주인도 당황해하며 서비스 회사에 claim을 넣겠다고 약속했다.



(3주: 절정) 월요일, 벌써 세번째 예약이다. 오전과 오후에 전화해서 '오늘은 정.말.로. 오는거 맞지?' 물었고 그는 '2시 이전에 갈거야'라는 답을 반복했다. 하지만 오후 3시까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화가 나서 와이프와 내가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상황을 전해들은 집주인도 열받아서 회사에 전화를 했지만 이곳도 막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월요일날 '문제 파악하고 1~2일 뒤에 연락 줄게'라는 답을 받았지만 수요일까지 아무도 연락을 주지 않았고, 수요일에 다시 전화하니 '내일까지는 연락 줄게'라고 했지만 역시나 답이 오지 않았다. 집주인은 금요일날 세번째로 전화를 걸어 '이런 식이면 그냥 계약 해지하겠다'라는 엄포를 놓았고,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회사는 '다음주에 새로운 기사 보내줄게'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4주~5주: 결말) 드디어 새로운 기사가 왔다. 온다고 한 날에 펑크 내지 않고 시간 맞춰 오다니 감동할 지경이었다. 성실한 인상에 열심히 두시간 가량 일하던 그는 '전에 왔던 기사가 진단 잘못 내렸는데? 부품 새걸로 갈아도 동작 안돼'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 이후로 일주일간 보험회사와 옥신 각신 전화 통화가 이어졌고, 결국 지친 집주인은 어제 저녁 전화를 걸어 사비로 식기세척기를 교체해 주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판매 업체의 사정으로 인해 새 식기세척기의 설치는 최소 2~3주 후에나 가능하단다. 허허허허. 한국이었으면 장난하냐고 따졌겠지만, 이미 이 문제로 진을 뺄만큼 뺀 와이프와 나는 그저 주인의 결단에 고마울 뿐이었다.






결국 나도, 집 주인도 패배자다. 우리 집은 식기세척기 고장 이후 한달이 넘게 손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으며, 집주인은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도 식기세척기 구매 비용의 보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승리자는 일을 이따위로 하면서도 보험료/임금을 받는 보험회사와 수리기사 정도일까? 한국처럼 친절하고 빠릿빠릿한 건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자기 할 일만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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