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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leap Mar 22. 2016

고민은 성장기 아이와 같다.

그 때, 나는 일기장이 아니라 편지지를 꺼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같은 고민을 반복해서 하신다.

심각한 나와 달리 엄마는 아빠가 식탁에 앉을 때마다 같은 얘기를 한다며 오히려 웃으셨다. 같은 얘기를 하시는 게 결국은 해결될 별 거 아닌 일일 거란 걸 다 아셔서 그런 거란 이유였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시며 엄마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으셨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해결되지 않은, 하지만 내 눈엔 콩알만 해보이는 고민에 대해 얘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난 웃을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민 따윈 없어 보였던 아버지가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걱정하시는 것. 또 그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 몸집을 불리게 놔두시는 그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척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처럼 태연할 수 없었던 건, 엄마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해드리는 걸 난 절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 부모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동안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같은 대답을 반복해봤던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그 콩알에게 키가 자랄 시간을 주지 마시라고. 그 콩알 하나 젓가락으로 콕 집어 꼭꼭 씹어 삼켜버리면 되잖으냐고 콕 집어 얘기하고 싶었던 거다.

콕 집어 꼭꼭 씹어 삼켜버리시라고. 그 쉬운 걸. 쪼끄만 콩알 볼 거 뭐 있다고 이리저리 뒤집어 살펴보고만 계시는거냐고 생각했던거다.

나는 아빠에게 "아빠, 일기를 쓰셔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콩알 얘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젓가락질이 아주 능숙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콩알만큼 단번에 집어내기 어려운 것도 없다. 동그랗고 단단한 콩알일수록 젓가락질을 잘도 피해 튀어나간다. 그리고 정말로도 우리 아버지는 젓가락질이 서툴다.

혼자서 밥상에 앉아 콩알을 집다가 그놈이 탁 하고 튀어나가면 서럽고 얄밉고 부아가 치밀 것이다. 하지만 밥상에 둘이 앉아 콩알이 탁 튀어나가면 콩알 튀듯 웃음이 깔깔- 튈 것이다.

그때, 난 아빠에게 일기를 쓰셔야겠다고 할 게 아니라 편지를 쓰자고 했어야 했다.

아빠가 혼자 동그란 콩알을 집느라, 단단한 콩알을 씹어 삼키느라 목메이고 속상하지 않도록 같이 깔깔- 웃어드렸어야 했다.


고민은 성장기 아이와 같다.

처음 생겨나는 순간엔 콩알만 하다가, 제 스스로 점점 몸집을 키워나간다. 마음속에 있던 작은 고민이 즉각 해결되지 않아 그 살집이 마음에 자꾸자꾸 쌓이면 이게 넘쳐흘러 입 밖으로 나온다. 같은 말을 계속하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계속 떠든다.

반복되는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은 처음엔 경청하다 다음엔 화를 내게 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 역시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이 변화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이 다음은 영혼없이 소리를 흘려듣는 단계다. 너무 슬프다.


이 슬픈 장면의 주인공은 듣는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거다. 무언가 답 혹은 '위로'라도 줘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짐을 지웠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답도 위로도 필요 없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단지 고민이란 녀석의 살집이 늘어났기 때문 아니던가.

말이 나오는 것을 멈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듣는 것이다. 마음 속에 매 순간 쑥쑥 자라나는 성장기 아이같은 고민을 데리고 있는 사람의 말은 마냥 들어주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 사람 역시 들을만한 이야기로 답해줘야한다.

혼자서 일기를 쓰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편지를 주고받는 상황이 되어야만 고민은 성장을 멈춘다.

일기가 아니라,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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