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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leap Mar 26. 2016

봄이 지나가는 길을 내다보며

진홍색 꽃송이보다 나는 눈을 기다렸다.

홍매화가 피어있는데, 눈이 오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엇다. 노란빛의 조명을 받아 더 붉게 빛나보이는 홍매화의 꽃망울 위로 하얗게 반짝이는 눈송이가 떨어지면 예쁠 것 같았다. 지겹도록 눈이 오는 겨울이 이제 막 끝난 참인데 다시 눈타령이라니, 스스로 떠올린 이 생각은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기 부끄럽게 여겨졌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은 생각이라는 목소리가 마음 한 구석에서 불쑥 솟았다. 지난 달, 봄이 왔나 싶었던, 아주 따뜻한 날이 있었다. 바로 그 다음 날 여보란 듯 눈이 펑펑 쏟아지지 않았던가. 홍매화에 흰 눈이 내리는 상상은 단순히 불쑥 떠오른 충동이 아니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었던 거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외투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사람도 있고,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서로를 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댓명이 성긴 무리를 지어 흔들리는 다리를 앞으로 내딛기도 한다.

유리창 한 장을 건너 나와 마주보고 있는 홍매화가 만약 내 앞에서 길을 걸어간다면, 어떤 걸음걸이로 걸어갈까.

여려보이는 꽃이파리와 단아해보이는 분홍색을 가졌지만, 자기를 감싸 덮고 있던 갈색의 딱딱한 껍질을 펼치고 삐져나온 저 뻔뻔한 얼굴을 보면 분명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남자일 것 같다. 오히려 조금 단단하고 질겨보이는 갈색의 저 껍질이, 홍매화 꽃잎에게 아무렇지 않게 제 몸을 열어 세상을 보여주는 저 껍질이야말로 나긋나긋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의 여학생일 것만 같다.

차갑고 반짝이는 눈송이가 내리면, 이 꽃잎은 오히려 당당할 것 같다. 저 분홍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얼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갈색 껍질은 얼고 쪼그라들어 죽어버리겠지. 정말 그건 '죽음'을 맞이한 얼굴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저 진홍색 꽃망울은 갈색 껍질이 둘러쓴 가면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부끄럽고 수줍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갈 가면이 필요했던 얼굴.

봄이 스쳐가는 길가를 내다보는 이 자리에서. 나는 눈을 기다린다. 가면을 얼려버리고 제 얼굴을 보여줄 차갑고 반짝이는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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