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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leap Feb 26. 2019

어느 예술가의 일주일:Chicken with plums

죽음을 이렇게 평범하게 얘기할 수 있다니.

산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보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 더 나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경우 마지막에 하는 선택이 바로 '자살'이라고 한다. 자살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종교도 있고, 사회적으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수많은 장치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자살율이 줄어드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본능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것, 즉 번식에의 욕구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는데, '자살'이라니. 모순 그 자체다.

이 영화 <자두치킨(Chicken with Plums)>은 인간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에 대해 철저히 개인적인 인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자살'과 '삶'에 대한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단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 남자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허용해준다.


죽고 싶어 죽은 남자.

살고 싶지 않아 죽은 것과 죽고 싶어 죽은 것은 아주 다른 얘기다. 죽고 싶어 죽은 이 남자의 삶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삶이었다. 아내도 사랑하는 딸과 아들도 있었다. 몇 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으니 죽음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그 어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일 뿐이다.

그는 삶에서 소중하게 여겼고, 그의 본성이 사랑했던 것들을 모두 잃었다. 그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충족되지 않는 삶은 고통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굳이 살아야 할 이유? 혹은 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아주 타당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길을 두고 수풀 속을 헤매는 여자.

반대로, 그의 아내는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삶을 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에 치이고,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살아왔다. 그녀가 바랐던 그 '사랑'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논리로 따진 변명일 뿐이다. 그녀가 그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길 바랐던 것은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자하는 욕망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관심을 두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산 사람인 것이다.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남자와 그 남자의 아내의 삶(혹은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무엇이 옳다거나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엇이 옳지도 더 낫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고자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다. 화면 속 남자의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아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딱 한 번, 남자가 죽음을 맞이한 후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과 우연히 다시 조우하는데, 그 여인이 흘리는 눈물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서 꾹꾹 개켜져있던 감정이 터져나오는 듯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남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을 주지만, 그 평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같다.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그래서 너무나 어렵고 두려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평범하게 얘기할 수 있다니.

201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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