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춤추는 워크숍, 활시위를 당기고 화투짝을 잡다
중소기업이라 해도, 대기업 부럽지 않게 챙기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창립기념일이다.
으리으리한 기업들은 이날을 통 크게 휴일로 지정하거나,
전 직원이 뮤지컬을 단체 관람하고 장기 근속자에게 번쩍이는 감사패를 수여하며 기업의 위용을 과시한다지만, 우리 회사는 좀 달랐다.
겉치레보다는 '인간미'와 '끈끈함'을 중시한다는 (포장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영진의 뜻에 따라, 창립기념일 행사는 늘 워크숍으로 갈음되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워크숍이었다.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이른, 해 뜨기 전 출근 도장을 찍는 기분으로 새벽 6시 회사 앞에 집결했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들 사이로 알 수 없는 기대감과 피곤함이 뒤섞여 부유했다.
대형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덜컹이는 길을 한 시간 반쯤 달렸을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기도 여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꽤나 괜찮아 보이는 자연 리조트였다.
찜질방에 야외 수영장, 심지어 양궁 연습장까지 갖춰진 걸 보니 꽤나 신경 쓴 모양새였다.
도착하자마자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풀 새도 없이 리조트 한편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내몰렸다. 가장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공식 프로그램은 다름 아닌 ‘족구’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공'이 들어가는 모든 활동에 지독히도 취약했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고, 농구공은 나를 기가 막히게 피해 갔으며, 축구공은 내 발에 닿기만 하면 어디론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말 그대로 나는 공을 쫓았지만, 공은 언제나 나를 멀리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도 나는 찬밥 신세겠군.'
예전 같았으면 남자들이 족구 시합으로 땀을 뺄 때, 여자들은 시끌벅적하게 편을 갈라 응원하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촌스럽고 의미 없는 구분을 하겠는가.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자! 족구 경기에 참가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양궁 연습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족구의 '족'자만 들어도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던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궁 연습장 팀에 합류했다.
'양궁'이라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저건 좀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예로부터 활 좀 쏜다는 '활의 민족' 아니겠는가!
DNA 어딘가에 활쏘기 유전자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어? 김혜진 대리가 학창 시절에 활 좀 쏴봤다고 들었는데."
귓가에 들려온 이름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김혜진 대리라니.
남들이 잘하는 꼴을 죽어도 못 보고, 본인만 제일 잘난 줄 아는 그 김혜진 대리가 양궁의 고수였다니! 이쯤 되니 단순히 유전자를 믿어볼까 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오기로 바뀌었다.
저 잘난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은 충동이 마그마처럼 끓어올랐다.
스마트폰을 꺼내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세계 랭킹 1위, 살아있는 전설 김우진 선수의 경기 영상을 찾았다. 쏜살같이 쏟아지는 영상 속 그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스탠스, 세트, 노킹, 세트업과 드로잉, 앵커링과 에이밍, 릴리스, 그리고 폴로스루까지.
마치 스펀지처럼 그의 모든 동작을 흡수했다. 미세한 손가락의 떨림, 과녁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 활을 쏜 후의 미동 없는 자세, 고요하게 이어지는 호흡까지.
‘그래, 오늘부터 나는 김우진이다! 비록 몸뚱이는 평범한 중소기업 대리 김민준일지라도, 내 영혼만은 세계 최정상 궁사의 그것과 하나 될 것이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우리 팀과 김혜진 대리 팀이 드디어 양궁 시합에서 맞붙게 된 것이다.
왁자지껄했던 족구 경기장과 달리, 양궁 시합 현장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위를 당길 때마다 나는 김우진 선수의 자세를 떠올렸고, 화살이 과녁에 꽂힐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전해졌다.
김혜진 대리 팀은 분명 실력이 있었지만, 김우진 선수의 영혼이 빙의된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최종 스코어는 5-1(57-57, 59-58, 59-56)! 놀랍게도 파리 올림픽 결승전과 점수까지 똑같았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시합이 끝난 후, 김혜진 대리의 눈빛은 석연찮은 의심으로 더욱 강렬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내가 꼼수를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 의심의 눈빛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이어진 회식 자리, 그리고 화투패가 돌아가기 시작한
고스톱 판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화기애애해야 할 저녁 식사 후 고스톱 자리였지만, 김혜진 대리의 날 선 목소리가 분위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녁은 먹고 왔어? 언제 또 자실지 모르는데?"
김혜진 대리가 노골적으로 나를 비꼬았다.
"지X하네. 어차피 X같이 나가는 거 나도 세상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먹어본 새X야. 말빨 조지지마, X발."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양궁에서 김우진이었다면, 고스톱 판에서는 고니가 될 차례였다.
비록 현실은 중소기업 회식 자리일지라도, 내 안의 승부사 기질이 끓어올랐다.
혜진 : 으흐흐 오우 아따, 그놈 성깔있네~ 밤새 죽기만 할 거여?
민준 : 남이사 죽든 말든. 언제는 나 죽었다고 부조금 내셨소.
혜진 : 걱정돼서 그라제. 설거지 당번 걸릴까봐.
민준 : 목소리 깔지 마.
혜진 : 고거 먹고 인건비나 나오겄어? 아야, 슬슬 고무장갑 준비해야 쓰겄다.
민준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혜진한테 밑에서 한 장, 정 과장도 밑에서 한 장, 나 한 장. 혜진한테 다시 밑에서 한 장, 이제 정 과장에게 마지막 한 장...
혜진 :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민준 : 뭐야.
혜진 : 내 패하고 정 과장 패를 밑에서 뺐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새X야.
민준 : 증거 있어?
혜진 : 증거? 증거 있지! 너는 나한테 9땡을 줬을 것이여. 그리고 정 과장한테 줄려는 이거 이거,
이거 장짜리 아니여? 자, 모두들 보쇼. 정 과장한테 장땡을 줘서 이 판을 끝내겠다, 이거 아녀?
민준 :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X끼가!
혜진 : 구라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냐?
민준 : 좋아. 이 패가 단풍이 아니라는 거에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 건다. 쫄리면 X지시든지.
혜진 : 이 신발놈이 어디서 약을 팔어?
민준 : 신발, 천하의 김대리님이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냐?
혜진 : 후달려? 으허허허허허. 오냐,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를 건다. 둘 다 묶어.
혜진 : 준비됐어? 까볼까? 자,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겄습니다잉. 따라라란 따라란 따라란 딴 쿵작
짜쿵작짜 따라리라라리
정과장 : 김대리 말대로 단풍 맞네?
혜진 : 아야~ 김민준 대리한테 고무장갑이랑 수세미 갖다줘라. 오늘 저녁 설거지 당첨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 <타짜>에서 현란한 손기술과 귀에 착착 감기는 배우들의 대사는 완벽하게 습득했지만,
정작 고니의 보이지 않는 손기술은 터득할 수 없었다. 손이 눈보다 너무 빨랐다.
다음부터는 좀 더 건전한 능력을 복사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