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오피스 : Dream Eater (8)
박준서에게 당한 배신은 지우를 깊은 무기력의 늪에 빠뜨렸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과 같았고, 동료를 믿는 것은 스스로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였다. 그는 회색의 그림자가 되어 오피스의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그런 그에게 오 부장은 보란 듯이 모욕적인 업무를 던졌다.
"한 대리, 저기 창고에 처박혀 있는 구형 서버들 있지? 그거 데이터 백업하고 폐기 처리 목록 좀 만들어놔. 옛날 자료라 먼지가 좀 많을 거야."
10년 치가 넘는 낡은 서버의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 신사업전략팀의 에이스에게 맡길 일이 아니었다.
명백한 좌천이자 길들이기였다.
지우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 쌓인 지하 서버실로 향했다.
케이블과 씨름하고, 수많은 폴더를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며칠째.
지우의 눈에 낯익은 이름의 폴더가 들어왔다.
[Project_D-Mind_Ver_Final_2015]
'D-Mind?' 무심코 폴더를 연 지우의 눈이 커졌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10년 전 작성된 프로젝트 기획안이었다.
사용자의 마음을 연결하여 치유한다는 내용, 혁신적인 UI, 세상을 바꾸겠다는 뜨거운 문장들.
그것은 놀랍도록 자신의 '마음링크'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작성자의 이름.
[PM : 오경민 과장]
지금의 서늘한 포식자가 아닌, 열정과 꿈으로 가득 찼던 10년 전의 '오경민 과장'이 거기에 있었다.
지우는 홀린 듯 관련 메일과 보고서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당시 오경민의 상사였던 본부장은 그의 'D-Mind' 프로젝트를 가로채 자신의 성과로 포장했다.
오경민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회사는 힘 있는 본부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었고, 동료들은 그를 외면했다.
결국 그는 지방 지사로 좌천되었고, 몇 년 후 독하게 살아남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드림이터에게 모든 것을 잃었던, 최초의 피해자였다.
그 순간, 지우는 오 부장을 향한 순수한 분노 대신 복잡하고 서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다. 자신의 꿈이 짓밟혔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다른 이들의 꿈을 짓밟으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꿈은 어차피 부서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행위는,
과거의 자신을 향한 조롱이자 시스템에 대한 뒤틀린 복수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서버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신입사원 김소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얼마 전, 팀 회의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아이디어를 발표했다가 오 부장에게 "학생 과제 수준"이라며 무참히 짓밟혔던 참이었다.
"대리님... 혹시 뭐 도와드릴 거라도..."
풀이 죽은 그녀의 얼굴에서 지우는 10년 전의 오경민과, 몇 달 전의 자신을 보았다.
이 잔인한 약탈의 고리. 여기서 끊지 않으면, 김소희는 제2의 한지우가, 한지우는 제2의 오경민이 될 터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지우는 자신의 개인 컴퓨터에 새로운 파일을 생성했다.
D_Archive.log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무력감과 분노로 떨리던 손가락이, 이제는 차가운 사명감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2027. 07. 02] 오경민 부장, '마음링크' 프로젝트 아이디어 편취 건. 증거자료: 최초 기획안 ver 0.1, 임원 보고 회의 요약본(비전 프로젝트).
[2027. 08. 15] 박준서 대리, '넥스톡 MAU 증대 전략' 편취 및 허위사실 유포 건. 증거자료: 최종 기획안 공유 메신저 기록, 병원 관련 허위 통화 녹취.
[2027. 10. 27] 김소희 인턴, 'Z세대 타겟 신규 서비스' 아이디어 폄훼 및 공개적 모욕 건. 증거자료: 회의 녹취 파일.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빼앗긴 꿈들의 묘비명이자, 다가올 전쟁을 위한 무기고였다.
지우의 눈동자에서 오랫동안 꺼져 있던 작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혼자 비명 지르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침묵의 기록자이자, 반격의 설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