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콜렉터 김대리 2화

DB 구축의 기본은 ‘분류’와 ‘정리’

by 공감디렉터J

지난밤의 유레카는 아침이 되자 숙취처럼 희미해졌다.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엑셀 파일은 광활한 사막처럼 텅 비어 있었다.

김민석 대리는 막막함에 다시 믹스커피를 탔다.

어젯밤의 흥분은 어디 가고,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하는 현타만이 씁쓸하게 밀려왔다.


“김대리, 또 멍 때려? 어제 계약 하나 했다고 벌써 배가 불렀나?”


박팀장의 아침 독설은 알람 시계보다 정확했다. 김대리는 화들짝 놀라며 엑셀 창을 재빨리 화면 아래로 내렸다. 이건 단순한 꼼수가 아니었다. 절박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시 엑셀 창을 띄웠다.


‘그래, 시작이 반이다. DB 구축의 기본은 분류와 정리부터.’


그는 먼저 연락처에 저장된 모든 이름을 엑셀 시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김영희: 친누나 / 월 1회 용돈 갈취

박진철: 대학 동기 / 결혼식 때 보고 못 봄

이충성: 군대 선임 / ‘충성!’하면 부담스러워함

박철웅: 고교 은사님 / 생명의 은인 1호


수백 개의 이름을 입력하며 김대리는 자신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초라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부분의 ‘최종 연락일’은 까마득한 과거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주소록이 아니었다.

그의 잠재적 자산 목록이자, 반격의 서막을 열어줄 비밀 병기였다.


데이터 입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뚫어야 했다.

김대리의 눈이 모니터 한구석의 링크드인 아이콘으로 향했다. 몇 년 전 취업 준비 때 만들어놓고 방치했던 계정이었다. 프로필 사진은 풋풋하다 못해 촌스러운 증명사진이었고, 경력은 ‘(주)정도기획 대리’ 한 줄이 전부였다.


‘이대로는 안 돼. 브랜딩이 필요해.’


그는 ‘실리콘밸리식 커리어 마인드’ 같은 유튜브 영상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며 프로필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B2B 영업과 CRM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을 구축합니다.’


스스로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이었지만, 그럴싸해 보였다. 그는 닥치는 대로 1촌 신청을 날렸다.

대기업 인사팀, 외국계 기업 마케터, 스타트업 대표...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물이 촘촘할수록 뭐라도 걸릴 확률은 높아지는 법이니까.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

익명의 관계가 가장 활발하게 맺어지는 현대인의 오아시스이자 정글.

그는 검색창에 ‘영업’, ‘직장인’, ‘인맥’ 같은 키워드를 쳐 넣었다. 수십 개의 채팅방이 떴다.


[직장인 꿀팁 정보 공유방 (873명)]

[영업의 신! 노하우 대방출 (1,500명)]

[여의도 직딩들 모여라 (452명)]


그는 닉네임을 ‘정도(正道)를 걷는 김대리’로 설정하고, 가장 활발해 보이는 몇몇 채팅방에 잠입했다.

온갖 이모티콘과 짤방, 의미 없는 잡담과 뼈 있는 정보들이 혼재하는 디지털 광장이었다.

그는 일단 눈팅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며 조용히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수상한 행동은 금세 레이더에 포착됐다.


“김대리, 요즘 아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않네? 주식이라도 해?”


에이스 강대리의 비아냥이었다. 그는 보란 듯이 억대 계약이 찍힌 서류를 흔들며 덧붙였다.


“그런 푼돈 주워 담아서 언제 집 사려고 그래? 한 방에 큰 거 터뜨릴 생각을 해야지, 안 그래?”


김대리는 속으로 ‘네, 아버님 친구분이 꽂아주는 그 큰 한 방 말씀이시죠’라고 되뇌었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박팀장 역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영업 전화는 안 하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으니, 딴짓을 하거나 이직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바로 그때였다.

[직장인 꿀팁 정보 공유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판교노예] : 아... 망했네요. 다음 주 창립기념일 행사인데, 홍보물 업체에서 배너 스탠드를 누락함 ㅠㅠ

지금 와서 급하게 구할 데 없을까요? 수량은 20개 정도인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배너 스탠드. 정도기획의 주력 상품은 아니지만, 협력업체를 통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이건 시험이었다. 디지털 인맥이 실제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해볼 기회.

그는 곧장 ‘판교노예’에게 1:1 대화를 걸었다.


[정도(正道)를 걷는 김대리] : 안녕하세요, 판교노예님. 채팅방에서 글 보고 연락드립니다. 혹시 배너 스탠드, 저희 쪽에서 긴급으로 처리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견적 한번 드려볼까요?

[판교노예] : 헉, 정말요? 제발요! ㅠ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같은 채팅방 멤버’라는 미묘한 유대감은 딱딱한 콜드콜과 달리 부드러운 윤활유가 되어주었다. 김대리는 협력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했고, 약간의 웃돈을 얹어주는 조건으로 긴급 제작을 약속받았다.


이틀 후, 김대리의 책상 위에는 두 번째 계약서가 놓였다. 이번에도 역시 강대리의 계약서에 비하면 명함 수준의 소액이었다. 하지만 박팀장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건 또 어디야? 판교? 자네가 판교에 연고가 있었나?”

“아, 그냥... 온라인으로 발품 좀 팔았습니다.”


강대리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팀장님, 저런 건 계약도 아니죠. 우리 회사 이미지만 깎아 먹는 겁니다.”


하지만 박팀장은 강대리의 말을 흘려들으며 계약서를 다시 한번 훑어볼 뿐이었다.

김대리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 파일을 열었다.


[성공사례 2호]

대상: 오픈채팅 ‘판교노예’

연결고리: 카카오톡 오픈채팅

결과: 배너 스탠드 20개 납품 계약.

교훈: 불특정 다수를 향한 그물망에도 월척은 아니어도 피라미는 낚인다. 피라미가 모이면 고래가 된다.


엑셀 시트의 빈칸이 하나둘 채워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미한 결과였지만, 김대리는 확신했다. 이건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다.

점수를 쌓고, 레벨을 올리고, 맵을 넓혀가는 하나의 게임이 되고 있었다.

책상 서랍 속에서 잠자던 낡은 명함첩을 꺼냈다.

지금껏 무시했던 모든 관계의 조각들을, 이제는 데이터로 재구성할 시간이었다.

‘인맥 콜렉터 김대리’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