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루팡에게도 간절한 ‘한 방’은 필요하다
“김대리, 숨은 쉬고 있나?”
월요일 아침 9시 1분. 박팀장의 목소리는 시베리아 한복판의 칼바람보다 날카로웠다. 출근과 동시에 영혼을 로그아웃시키는 이 한마디에, 김민석 대리는 마시던 믹스커피가 역류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네, 팀장님. 그럼요. 하하.”
“숨만 쉬니까 문제지.”
팀장의 혀 차는 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대한민국 K-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월요병이라지만, 중소기업 ‘(주)정도기획’ 영업 2팀의 김민석 대리에게 월요일은 병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책상 위에는 지난주 내내 클로징하지 못한 계약서들이 흉물처럼 쌓여 있었고, 모니터 한구석에 띄워놓은 영업실적 그래프는 심전도 기계의 사망선고처럼 밋밋하게 바닥을 기고 있었다.
김민석, 31세.
평범한 지방대, 더 평범한 집안,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스펙. 그의 인생은 ‘그저 그런’이라는 네 글자로 요약 가능했다. 입사 4년 차, ‘그저 그런 신입’의 딱지는 ‘그저 그런 대리’로 업그레이드되었을 뿐이었다. 동기인 강대리는 아버지 친구 회사의 대형 계약을 따내며 벌써 팀의 에이스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김대리는 팀의 구색을 맞춰주는 병풍에 가까웠다.
“김대리, 이번 주까지 신규 건 하나라도 못 뚫으면 주말 출근할 준비 해. 알았어?”
“네, 팀장님...”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 주말 출근.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대체 어디서 신규 건을 뚫는단 말인가.
맨땅에 헤딩하듯 콜드콜을 돌려봤자 돌아오는 건 냉담한 거절뿐이었다. 이제는 수화기 너머의 “됐습니다.”라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날의 운세를 점칠 수 있을 경지였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마트폰 연락처를 스크롤했다. 친구, 대학 선후배, 군대 동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이름들만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눈에 띈 이름 하나.
고교 은사님 - 박철웅 선생님
까마득한 고3 시절, 존재감 없던 자신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셨던 문학 선생님이었다.
‘민석이는 글에 진심이 담겨 있어.’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였던가. 하지만 졸업 후 제대로 찾아뵌 적 한 번 없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선생님의 이름을 떠올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이건 영업이 아니야. 그냥 안부 인사드리는 거지.’
스스로에게 구차한 변명을 되뇌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서, 선생님! 저 민석이에요. 김민석!”
다행히 선생님은 희미한 이름 석 자를 기억해냈다. 어색한 안부 인사가 오가고,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지금은 작은 회사에서 영업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 선생님은 잠시 침묵하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래? 우리 처남이 작은 인쇄소를 하는데, 얼마 전에 사무용품 납품하던 업체가 부도가 나서 곤란해하더라고. 자네가 취급하는 품목이랑 맞으려나 모르겠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사무용품. 바로 정도기획의 주력 상품 중 하나였다.
“네? 네! 저희가 바로 그 사무용품 전문입니다, 선생님!”
김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영업사원의 톤으로 돌변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버버 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절박함이 혀를 매끄럽게 움직이게 했다. 선생님은 처남의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김대리는 수십 번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선생님이라는 든든한 ‘백’ 덕분이었을까. 처남인 인쇄소 사장은 그의 어설픈 제품 설명을 끝까지 들어주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듯 흔쾌히 분기별 납품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금액은 크지 않았다. 고작해야 강대리가 하루 만에 따내는 계약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소액이었다.
하지만 김민석의 세계에서는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었다.
수요일 오후, 계약서를 들고 사무실에 복귀한 그를 향해 박팀장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거 뭐야? 신규?”
“네, 팀장님. 겨우 하나 했습니다.”
“어디? 미래인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인데. 여길 어떻게 뚫었어?”
“아... 그게, 그냥 발로 뛰었습니다. 하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은사님 찬스 썼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팀장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지만, 어쨌든 ‘0’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한 듯 툭 던졌다.
“그래. 놀고먹는 것보단 낫네.”
칭찬이라기엔 심장에 스크래치가 나는 말이었지만, 김대리의 귀에는 세상 어떤 찬사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온전한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 그리고 박팀장에게서 ‘쓸모없다’는 말 이외의 평가를 받은 것도.
그날 밤, 김대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계약 성공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유창한 화술? 완벽한 제품 설명? 아니었다. 단 하나, ‘박철웅 선생님’.
내가 쌓아 올린 실력이 아니라, 나와 선생님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이거다!’
그는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먼지 쌓인 노트북을 열어 빈 엑셀 시트를 켰다.
A열 1행에 떨리는 손으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
학벌도, 재력도, 특출난 능력도 없는 김민석.
그가 이 정글 같은 직장 생활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무기는 바로 ‘사람’이었다.
스펙을 쌓을 수 없다면, 인맥을 쌓으면 된다. 실력이 없다면, 관계를 만들면 된다.
이것은 ‘그저 그런 대리’ 김민석이 대한민국 최고의 ‘인맥 콜렉터’로 거듭나는 첫날의 기록이었다.
비록 시작은 구차하고 꼼수 같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이 사소한 깨달음이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극적으로 바꿔놓을지를.
엑셀 시트의 커서가 다음 셀에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불확실하지만, 뜨거워질 미래처럼.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