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콜렉터 김대리 3화

타겟팅과 명분

by 공감디렉터J

피라미 몇 마리를 낚았다고 해서 정글의 포식자가 될 수는 없었다.

김민석 대리의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은 여전히 초라했다.

성공사례 2건의 총매출을 합쳐봐야, 강대리가 점심시간에 따내는 계약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박팀장의 의심은 여전했고, 동료들의 시선은 ‘운 좋은 놈’ 혹은 ‘한심한 놈’ 둘 중 하나였다.


‘수비는 끝났다. 이제 공격이다.’


김대리는 퇴근 후, 책상 서랍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낡은 명함첩을 꺼냈다.

지난 4년간 무의미하게 주고받았던 수백 장의 종이 조각들.

이전 같았으면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을 그것들이, 이제는 보물 지도로 보였다.

그는 한 장 한 장 스캔하듯 훑어보며 엑셀 시트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분류 기준은 더 세분화되었다. ‘접근 용이성’, ‘예상 가치’, ‘필요 명분’.

그때, 손가락이 한 명함 위에서 멈췄다.


(주)넥스트유니콘 기획팀 / 최정훈 과장


최정훈. 4년 전, 딱 한 번 마주쳤던 대학 3년 선배였다. 같은 과였지만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어색한 사이. 유일한 접점은 교양과목 조별 과제에서 같은 조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당시 김대리는 쭈뼛거리다 발표 자료 오타 수정 몇 개 한 게 전부였고, 하드캐리했던 것이 바로 이 선배였다.

(주)넥스트유니콘은 업계에서 가장 핫한 IT 스타트업 중 하나였다.

만약 이곳과 거래를 틀 수만 있다면, 이건 피라미가 아니라 최소 참치급이었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4년 만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선배님, 저 민석인데요. 조별 과제 때 신세 졌습니다. 저희 회사 물품 좀 써주시죠.”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인맥 활용이 아니라 민폐였다.


고민에 싸여 캔맥주 하나를 사 들고 집 앞 벤치에 앉았다.

늦여름 밤공기가 머리를 식혀주는 듯했다. 그때, 옆에 놓인 철물점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만물철물’의 여사장, 조미란 씨가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만 하던 사이였다.


“총각, 나라 잃은 표정이네. 회사에서 깨졌어?”


조미란 사장이 빗자루를 세우며 툭 던졌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고,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나 지금 죽을 맛이에요’ 써 붙여놓고. 뭔데? 여자? 돈?”

“...일 때문에요.”


김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술술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냥, 어려운 계약 건이 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수준의 푸념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조 사장이 피식 웃었다.


“총각, 사냥꾼이 사냥감한테 ‘나 너 잡으러 왔어’ 하고 덤벼들어?”

“네?”

“명분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 선배라는 양반, 뭐하고 사는지 뒷조사는 해봤어?”


뒷조사. 단어는 상스러웠지만, 김대리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달려가 노트북을 켰다. 최정훈 선배의 이름과 회사명을 조합해 검색을 시작했다. 링크드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각종 커뮤니티 게시글... 디지털 세상에 흩어진 그의 흔적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최정훈 선배의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이었지만 프로필 사진과 소개 글은 볼 수 있었다.


‘테니스 치는 기획자. #테린이 #주말운동’


찾았다. 명분.

김대리는 곧장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테니스 라켓 이미지로 바꿨다. 그리고 밤새 테니스 관련 유튜브를 보며 ‘포핸드’, ‘발리’, ‘랠리’ 같은 용어들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다음 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최정훈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민석] : 안녕하세요, 선배님. 경영학과 후배 김민석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 다름이 아니라, 프로필 사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테니스 시작하셨나요? 저도 요즘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는 분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요!


치밀하게 계산된 우연. 그는 메시지를 보내놓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기다렸다. 1시간, 2시간...

포기할 때쯤, ‘1’이 사라졌다.


[최정훈 과장] : 어, 민석이?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 같은 조였잖아.ㅋㅋ 너도 테니스 쳐? 대박. 나 완전 테린이라 요즘 맨날 깨지는 중인데. 언제 한번 같이 치자!


미끼를 물었다.

그 후 몇 번의 메시지가 오갔고, 김대리는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척 자신의 회사와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원하던 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최정훈 과장] : 아, 너희 회사가 사무용품이랑 전산용품도 취급하는구나. 마침 우리 회사 총무팀에서 다음 분기 비품 계약 업체 알아보고 있던데. 내가 담당자한테 너희 회사도 리스트에 넣어보라고 말해줄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말해줄게’라는 말이 ‘계약할게’는 아니었지만, 이건 이전의 성공과는 차원이 다른 문을 연 것이었다. 중소기업 영업사원이 대기업의 문고리조차 잡기 힘든 현실에서, 그는 가장 핫한 스타트업의 ‘구매 고려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김대리는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 파일을 열었다.


최정훈: (주)넥스트유니콘/과장, In Progress

명분: 테니스. 1차 제안 완료.


‘In Progress’. 진행 중이라는 여섯 글자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취감에 취해 인맥 리스트를 스크롤했다. 이제 다음 타겟을 물색할 차례였다. 그러다 한 이름 앞에서 그의 손가락이 돌처럼 굳었다.


오한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척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그의 서툴렀던 첫사랑.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SNS를 통해 간간이 소식을 엿보곤 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국내 최고 대기업에 입사해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

그의 인맥 리스트에서 유일하게 ‘예상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이름.

‘인맥 콜렉터’ 김대리의 심장이 처음으로, 전략이나 계산이 아닌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