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콜렉터 김대리 4화

레벨이 다른 세상

by 공감디렉터J

오한나.


그 이름은 김민석의 엑셀 시트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관계’나 ‘예상 가치’ 같은 비즈니스 용어로 분류할 수 없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수였다. 그는 차마 그녀의 이름 옆에 어떤 데이터도 입력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커서만 깜빡이게 둘 뿐이었다.

어린 시절, 전학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앓았던 풋사랑의 기억이 십수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SNS를 마지막으로 엿본 게 벌써 1년 전이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 ‘LK그룹’의 마케팅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세상의 정점에서 빛나는 사람. 그에 비해 자신은 지하 1층 곰팡내 나는 사무실에서 실적을 걱정하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 대리. 그 간극이 현실감 없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 간극이 김대리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최정훈 선배와의 계약이 ‘진행 중’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높은 곳, 더 큰 무대로 가야만 했다.


그는 무작정 LK그룹의 본사가 있는 여의도로 향했다. 약속도, 연줄도 없었다. 그저 그 거대한 빌딩의 공기라도 마시면 뭐라도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객기였다.

빌딩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김대리는 압도당했다. 바닥은 거울처럼 빛났고, 천장은 하늘처럼 높았다. 세련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바쁘게 오갔다. 낡은 구두에 어깨가 살짝 구겨진 정장을 입은 그는, 마치 최고급 레스토랑에 잘못 들어온 동네 중국집 배달원처럼 초라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안내데스크 직원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눈빛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스캔하며 등급을 매기고 있었다.


“아... 저, (주)정도기획의 김민석이라고 하는데요. 마케팅팀과 비품 납품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혹시 담당자와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그건 아닌데, 잠깐이라도...”

“약속 없이는 방문이 불가능하십니다, 고객님.”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그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는 구차한 변명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패배감과 자기혐오가 온몸을 휘감았다. 역시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자동문이 열리며 여러 명과 함께 걸어 나오던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췄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

어릴 적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완벽한 커리어 우먼의 모습이었다.

오한나. 그녀였다.


“...한나?”


김대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까. 그녀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김민석?”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환상은 짧았다. 그녀 옆에 있던 동료들이 “팀장님, 회의 늦겠습니다.”라고 재촉했다.

“아, 어. 금방 갈게.”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되찾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 어... 나도 뭐, 미팅 때문에...”


차마 맨땅에 헤딩하러 왔다가 쫓겨나는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거짓말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이걸로 연락 한번 줘. 밥 한번 먹자.”


김대리는 얼떨떨하게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 역시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녀가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 잠시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동료들과 함께 바쁘게 멀어져 갔다.


홀로 남은 김대리는 손에 들린 두 개의 명함을 번갈아 보았다.

[LK그룹 마케팅 1팀 팀장 / 오한나]

매끄러운 질감의 종이, 감각적인 디자인, 군더더기 없는 로고.

[(주)정도기획 영업 2팀 대리 / 김민석]

얇고 힘없는 종이, 촌스러운 파란색 폰트, 구석에 인쇄된 팩스 번호.


이 작은 종이 두 장이, 둘 사이의 거리이자 세상의 높이였다.

그는 더 이상 인맥을 ‘수집’하는 콜렉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그녀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그녀의 명함 옆에 자신의 명함을 부끄럽지 않게 놓을 수 있는 ‘플레이어’가 되어야만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지, 박팀장이 그를 호출했다.

“김대리. 넥스트유니콘 말이야. 그냥 제안서 말고, 걔네 회사에 딱 맞는 맞춤형 기획안을 가져오라는데. 할 수 있겠어? 괜히 어설프게 찔러봤다가 회사 망신만 시키지 말고.”


예전의 김민석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LK그룹 로비에서 오한나를 마주친 지금의 김민석은 달랐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뜨거운 결심만이 이글거렸다.


“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탕, 타타탕.’

평소와는 다른, 단호하고 힘 있는 타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새로운 워드 파일을 열었다.


[For (주)넥스트유니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최적의 비즈니스 파트너십 제안서


이 제안서는 단순히 계약을 따내기 위한 서류가 아니었다.

레벨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그의 첫 번째 출사표였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