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의 자격
“해보겠습니다.”
뱉은 말은 용감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김민석 대리는 텅 빈 제안서 화면 앞에서 세 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LK그룹 로비에서 마주친 오한나의 모습과 박팀장의 싸늘한 눈빛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멋진 출사표를 던졌지만, 정작 손에 든 무기는 녹슨 창 한 자루뿐이었다.
‘어떻게... 뭘로 채워야 하지?’
그는 한숨을 쉬며 ‘인맥 네트워크 관리’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최정훈 선배의 데이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명분으로 삼았던 ‘테니스’는 문을 여는 열쇠였을 뿐, 성을 함락시킬 대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인맥은 기회를 줄 뿐, 결과를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실력’이라는 것을.
‘실력이 없다면, 실력처럼 보이게 만들면 된다.’
김대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사냥감의 모든 것을 분석하는 맹수처럼 (주)넥스트유니콘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의 보도자료, 대표 인터뷰, 기업 공시, 심지어는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익명의 푸념까지. 그는 모든 정보를 긁어모아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로 재구축했다.
밤이 깊어졌다. 사무실에는 그와 서버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분석 결과, 넥스트유니콘의 가장 큰 문제는 ‘급격한 성장통’이었다. 스타트업 특유의 자유로운 문화와 수평적 구조가 회사가 커지면서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특히 사내 익명 게시판에는 ‘회의실 예약 시스템이 개판이라 매번 전쟁이다’, ‘출력물 하나 뽑으려면 3개 부서를 거쳐야 한다’는 식의 불만이 넘쳐났다.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날카로운 한 방,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를 ‘내부 정보’가 필요했다. 그는 자신이 잠입해 있던 수십 개의 오픈채팅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판교 IT 직딩 수다방]에서 넥스트유니콘 소속의 주니어 사원을 찾아냈다.
김대리는 신분을 숨긴 채, IT 업계의 고충을 토로하는 척 그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끝에,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냈다. 넥스트유니콘은 최근 정보보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특히 개인 프린터 사용으로 인한 문서 유출 가능성이 큰 리스크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찾았다.”
김대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 뒤편으로, 자신의 방식이 점점 더 위험한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 스쳤다.
그의 수상한 행보는 사무실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홀로 남아 무언가에 몰두하고, 쉬는 시간마다 스마트폰을 붙들고 누군가와 비밀스럽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 이 모든 것이 에이스 강대리의 눈에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저거 봐, 저거. 요즘 김대리 이상하지 않아?”
강대리는 다른 동료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어디서 이상한 정보라도 빼오는 거 아니야? 우리 회사 자료를 경쟁사에 넘긴다거나. 저러다 사고 한번 크게 치겠는데.”
악의적인 소문은 곰팡이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동료들은 그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고, 커피를 마시러 가서도 그가 다가오면 대화를 멈췄다. 김대리는 순식간에 투명인간이자, 잠재적 스파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애써 무시하며 제안서에만 몰두했다. 밤샘 작업으로 퀭한 그의 모습을, 파티션 너머로 지켜보던 박팀장이 자리로 다가왔다.
“...뭐 하나 물어보자.”
“네, 팀장님.”
“네가 팔려는 게 뭐냐?”
“네? 저희 회사 사무용품이랑 전산 장비들입니다.”
박팀장은 혀를 찼다.
“멍청한 놈. 걔들이 그걸 몰라서 너랑 계약 안 하는 줄 알아? 네가 팔아야 할 건 프린터나 A4용지가 아니야. 그놈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파는 거라고. 그것도 못 깨달았으면 그냥 덮고 잠이나 자.”
무심하게 툭 던진 말이었지만, 김대리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정보의 조각들이 박팀장의 한마디에 거대한 그림으로 맞춰졌다.
그래, 해결책.
그가 팔아야 할 것은 단순한 물품이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강화된 문서 보안 시스템을 구축해, 넥스트유니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돕는 솔루션.’ 바로 이것이었다.
고립감과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손가락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소문 따위는 상관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다.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배경으로, 김대리는 제안서의 제목을 새로 입력했다.
[주식회사 넥스트유니콘의 업무 효율성 극대화 및 보안 강화를 위한 맞춤형 오피스 통합 솔루션 제안]
이것은 인맥에 의존하던 ‘콜렉터’가 아닌, 정보와 전략으로 승부하는 ‘사냥꾼’으로서 내미는 첫 번째 창이었다. 그의 자격을 증명할 시험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