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콜렉터 김대리 6화

PT, 증명 그리고 반격

by 공감디렉터J

다음 날 아침, 사무실의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

밤샘의 흔적이 역력한 김민석 대리가 프린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제안서를 받아들었다.

스무 장 남짓한 종이 묶음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동료들은 그를 대놓고 외면했고, 특히 강대리는 경멸과 조소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김대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박팀장의 책상으로 다가가, 마치 결투를 신청하듯 제안서를 내려놓았다.


“팀장님, 넥스트유니콘 제안서입니다.”


박팀장은 아무 말 없이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딸깍’ 하고 안경을 고쳐 쓰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한 장, 한 장,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김대리의 심장을 졸였다. 시간이 영원처럼 흘렀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은 박팀장은, 한참 동안 김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준비해. 11시 미팅이다. 나도 같이 가.”


칭찬도, 지적도 없었다. 하지만 ‘같이 가겠다’는 그 한마디는 그 어떤 격려보다 강력한 신뢰의 증표였다.

김대리의 등 뒤에서 강대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출발 직전, 사건이 터졌다.

강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가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팀장님! 정말 저렇게 출처 불분명한 자료로 만든 제안서를 들고 가실 겁니까? 저거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정보가 아닙니다! 저러다 회사 전체가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습니다!”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동료들의 눈빛에는 ‘거봐, 내 말이 맞지?’ 하는 의심과 묘한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김대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박팀장의 입을 주목했다. 그가 김대리를 질책하고 미팅을 취소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박팀장은 천천히 강대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무실 전체를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가웠다.


“강대리.”

“네, 팀장님.”

“남의 실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시간에, 자네 다음 주 실적 보고서나 신경 써. 최소한 김대리는, 자네처럼 아버님 친구 회사에 전화 돌리는 대신 밤새워 일이라도 했으니까. 뭐가 됐든, 일 안 하는 놈보단 일하는 놈이 나아.”


완벽한 반격이었다.

강대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무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김대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편에 서준 상사의 넓은 등을 보았다. 그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박팀장의 뒤를 따랐다.


넥스트유니콘의 회의실은 (주)정도기획과는 차원이 다른 공간이었다.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졌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그 자체로 회사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최정훈 선배와 총무팀 담당자들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박팀장은 뒷자리에 팔짱을 낀 채 앉아, 모든 것을 김대리에게 맡긴다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주)정도기획의 김민석입니다.”


첫 목소리는 떨렸지만, 스크린에 제안서 첫 페이지가 띄워지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어리바리한 영업사원이 아니었다. 그는 넥스트유니콘의 가장 깊은 고민을 꿰뚫어 본 분석가이자, 해결책을 제시하는 컨설턴트였다.


“...귀사는 현재 폭발적인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리의 비효율성’과 ‘내부 정보 보안’이라는 두 가지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것은 단순한 비품 공급이 아닙니다. 중앙 관리형 복합기 도입을 통한 출력 프로세스 간소화 및 로그 기록 관리, 그리고 사원별 ID카드 인증을 통한 문서 보안 시스템 구축입니다. 이를 통해 연간 약 15%의 비용 절감과...”


그의 입에서는 밤새도록 분석하고 고민했던 데이터와 논리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최정훈 선배를 비롯한 담당자들의 표정이 점점 놀라움으로 바뀌어 갔다.


발표가 끝나자, 총무팀장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김민석 대리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희의 내부적인 문제점들을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파악하셨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 박팀장조차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김대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미소로 답했다.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고객사의 문제를 저희 자신의 문제처럼 고민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밤낮으로 귀사의 성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연구했습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인맥’이나 ‘정보 수집’이 아닌 ‘진심’과 ‘노력’이라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가치로 자신의 모든 과정을 포장했다.


미팅이 끝나고 나오는 길, 최정훈 선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김민석. 너 진짜 다시 봤다. 우리 조별과제 할 때의 너 맞아?”


빌딩을 나서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박팀장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김대리의 어깨를 툭, 하고 한 번 쳤다.


“수고했다.”


그 한마디에, 지난 며칠간의 고생과 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대리는 이미 세상 가장 큰 계약을 따낸 기분이었다.

그는 마침내, 인맥에 기생하던 껍질을 깨고 자신의 힘으로 서는 법을 증명해냈다.

‘인맥 콜렉터 김대리’의 진짜 1부가,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