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속삭임
청담동의 화려한 밤이 지나가자, 김민석의 세계는 다시 잿빛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넥스트유니콘의 성공은 그에게 ‘유능한 대리’라는 잠시의 타이틀을 안겨주었지만, 오한나와의 저녁 식사는 그 타이틀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그는 더 이상 작은 성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서 있는 세상과 자신의 세상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을 넘기 위해서는, 단숨에 몇 계단을 뛰어오를 더 큰 사다리가 필요했다.
“김대리, 다음 타겟은 정했나?”
박팀장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부드러워졌지만, 그 안에 담긴 압박의 무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한 번의 홈런은 운일 수 있어. 연속 안타를 쳐야 진짜 실력이지.”
그는 김대리가 가져온 승리의 단물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그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새로운 사냥감은 명확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선양그룹’.
만약 선양을 뚫을 수 있다면, 그건 업계 전체를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자, LK그룹의 오한나에게도 가닿을 수 있는 거대한 발판이 될 터였다.
하지만 선양그룹은 철옹성이었다.
정보 보안은 업계 최고 수준이었고, 담당자들은 웬만한 중소기업의 제안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대리는 며칠간 콜드콜과 이메일로 문을 두드려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계적인 거절의 메시지뿐이었다.
넥스트유니콘을 공략했던 ‘디지털 뒷조사’ 방식도 두꺼운 보안벽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운빨이었다니까.”
강대리는 보란 듯이 떠들고 다녔다. 그는 최근 넥스트유니콘에서 정보 유출 관련으로 내부 감사를 진행했다는 식의, 교묘하게 날조된 소문을 퍼뜨리며 김대리를 압박했다. 김대리의 성공을 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동료들은 다시 강대리의 편에 서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고립감과 초조함이 다시 김대리의 목을 조여왔다.
그날 밤,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인맥 네트워크 관리 v1.0’ 파일을 열었다.
수백 개의 이름들을 훑어 내리던 그의 손가락이, 늘 의식적으로 피해 가던 한 이름 위에서 멈췄다.
이수진!
대학 시절, 2년간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
그들의 이별은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졸업 후, 유수 대기업에 최종 합격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 그녀와, 연이은 취업 실패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그 사이의 거리가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 그냥 좋은 친구로 남자.”
그녀의 마지막 말은 배려였지만, 그에게는 사망선고와 같았다.
그는 애써 외면하려던 ‘소속/직급’ 칸을 보고야 말았다.
[선양그룹 / 법무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 글자들이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직접적인 계약 담당 부서는 아니지만, 내부 정보를 얻거나 핵심 인물에게 다리를 놓아줄 가능성이 충분한 위치였다.
‘안 돼. 이건 아니야.’
그는 노트북을 쾅 닫아버렸다. 오한나 앞에서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추억을, 그것도 아프게 끝난 사랑의 기억을 비즈니스의 도구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인맥 콜렉터’가 아니라 ‘인간쓰레기’가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압박은 그의 다짐을 비웃듯 거세게 몰아쳤다.
박팀장은 “다음 주까지 선양그룹에 대한 공략 플랜 보고해. 못하면 이번 분기 성과급은 없던 걸로 알지.”라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사무실에서 그는 다시 ‘한탕주의자’, ‘스파이’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한 걸음 뒤는 추락하는 절망뿐이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넘고 싶지 않았던 선을 넘어야만 했다. 오한나에게 닿고 싶다는 열망,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이 그의 마지막 남은 윤리 의식을 좀먹고 있었다.
금요일 밤, 사무실에 홀로 남은 김대리는 멍하니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봤다.
통화기록 저편에 잠들어 있던 ‘이수진’의 이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한나의 웃는 얼굴, 박팀장의 압박, 강대리의 비웃음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이름을 눌렀다.
뚜- 뚜-
차가운 신호음이 고요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제발 받지 마라, 받지 마라... 마음속으로 빌었지만,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너무나도 익숙했던, 그러나 이제는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김민석은 마른 입술을 겨우 떼어냈다. “수진아, 나... 민석이야.”
스스로 악마와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