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인연의 값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수진의 목소리에 김민석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3년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 변함없이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거리감이 있었다.
“수진아, 나... 민석이야. 잘 지내?”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안부를 묻는 오랜 친구인 척 연기하려 애썼다.
침묵이 흘렀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졌다.
“...김민석? 정말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 ‘용건이 뭐야?’라는 경계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역시 그녀는 예리했다.
“아니, 그냥... 연락처 보다 보니까 생각나서.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나는 잘 지내. 그래서, 용건은?”
그녀는 그의 구차한 변명을 단칼에 잘라냈다.
김대리는 더 이상 돌려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본론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지금 선양그룹 관련해서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혹시나 해서. 워낙 큰 회사라 어디부터 접근해야 할지 막막해서 말이야.”
또다시 침묵.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차갑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민석아, 너 여전하구나.”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김대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전하다니. 늘 현실에 허덕이고,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보려 아등바등하던 과거의 모습.
그녀가 떠나갔던 이유가 바로 그 모습 때문이었음을, 그는 다시 한번 상기해야만 했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연락을...”
“아니, 됐어.”
그녀는 그의 사과를 막았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사무적인 톤으로 말했다.
“비품 관련이면 구매1팀 최동환 차장 찾아가. 그리고 요즘 우리 회사, ESG 경영 엄청 강조하니까 그쪽으로 어필해보든가. 그럼 끊는다.”
“수진아, 잠깐만...!”
‘뚝.’
그가 무언가 더 말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허공에 뜬 손을 한참 동안 내리지 못했다. 그는 원하는 담당자의 이름과 핵심 단서를 얻었다.
‘인맥 콜렉터’로서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인간 김민석’으로서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옛사랑의 마지막 남은 배려심마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연료로 태워버린 것이다.
그날 밤, 김대리는 집 앞 철물점 ‘만물상사’ 앞에서 깡소주를 들이켰다.
죄책감에 속이 쓰렸다. 오한나의 “계산을 깔고 대하는 게 버겁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경멸하던 유형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총각, 그러다 속 버려.”
어느새 다가온 철물점 사장 조미란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한 표정이야?”
김대리는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제가 너무 쓰레기 같아서요”라고 중얼거렸다.
조 사장은 그의 소주병을 뺏어 한 모금 들이켜더니, 툭 내뱉었다.
“총각, 다리 밑에서 주운 돌이든, 남의 집 담장에서 훔친 돌이든, 일단 손에 쥐었으면 그걸로 집을 지을 생각을 해야지. 후회는 나중에 번듯한 집 다 짓고, 배 두드리면서 해도 안 늦어. 손에 피 묻히는 게 무서우면 사냥 같은 건 시작도 말았어야지.”
그녀의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위로보다 현실적인 채찍질이었다.
그렇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더러운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는 정말 추억까지 팔아먹은 쓰레기로 남을 뿐이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김대리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위로 차가운 결의가 덧씌워졌다.
그는 곧장 선양그룹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째로 외울 기세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ESG 경영.’ 이수진이 던져준 이 키워드는 철옹성 같던 선양그룹의 유일한 열쇠 구멍이었다.
그는 기존의 제안서를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했다. ‘친환경 재생용지 사용 제안’, ‘에너지 절감형 전산장비 리스 프로그램’, ‘장애인 기업이 생산한 사무용품 특별 공급을 통한 사회적 책임 이행 방안’.
그의 제안서는 더 이상 단순한 영업 자료가 아니었다.
선양그룹의 기업 철학을 관통하는 맞춤형 전략 보고서로 진화하고 있었다.
며칠 후, 그는 이수진이 알려준 ‘최동환 차장’의 이메일로 완성된 제안서를 발송했다.
메일을 보내기 직전, 그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이수진의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는 미안함을 빚처럼 가슴 깊이 묻었다. 이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성공해서 더 이상 이런 비겁한 수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