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콜렉터 김대리 12화

증명, 모든 것을 걸고

by 공감디렉터J


선양그룹 32층, 임원 회의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심장부 한복판에, 김민석 대리가 서 있었다.

길고 묵직한 마호가니 테이블 저편에는 선양그룹의 실세 임원 셋이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안경 너머로 재무제표를 꿰뚫어 볼 듯한 재무 담당 부사장, 온화한 미소 뒤에 냉철한 계산을 감춘 홍보 담당 전무,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기술 담당 상무까지.


회의실 구석, 박팀장은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그의 포커페이스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김대리는 등 뒤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창끝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마디는 연습과 달리 미세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스크린에 첫 장이 띄워지자, 김대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정도기획의 영업사원이 아니었다. 선양그룹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략가였다.

그는 자사 소개를 생략했다. 대신, 선양그룹 회장의 신년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위대한 기업은 시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저는 회장님의 이 말씀에서 이번 제안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질문은 단연 ‘지속 가능한 성장’, 즉 ESG입니다.”


그는 각 임원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 이제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닌,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전무님, 진정성 있는 ESG 활동은 그 어떤 광고보다 강력한 브랜딩입니다. 그리고 상무님, 친환경 기술은 미래 시장의 핵심 경쟁력입니다.”


임원들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단순한 영업사원의 판촉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김대리는 준비해 간 ‘원페이지 요약 보고서’를 각 임원 앞에 놓았다. 그리고 스크린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에서는 데이터와 논리로 무장한 해결책이 쏟아져 나왔다.


“단순히 친환경 용지를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용지 사용량을 분기별로 데이터화하여 부사장님의 ‘코스트 절감’ 목표에 기여할 것입니다. 저희의 에너지 절감형 장비는 전무님이 추구하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미지를 강화할 것이며, 상무님이 강조하시는 ‘미래 기술과의 호환성’을 완벽하게 보장합니다.”


그는 더 이상 물건을 팔지 않았다. 그는 각 임원이 가진 각자의 목표를 달성시켜줄 ‘가치’를 팔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준비한 마지막 페이지가 화면에 떴다.


“정도기획은 선양그룹에 물건을 팔러 온 것이 아닙니다. 선양그룹의 ESG 경영 파트너가 되어, 지속 가능한 100년 기업의 여정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박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기술 담당 상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김대리, 아주 인상적이오. 그런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해야겠소. 우리 내부 사정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아는 겁니까? 마치 우리 회사 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오.”


올 것이 왔다. 모두의 시선이, 특히 박팀장의 시선이 창처럼 날아와 그에게 박혔다. 그의 경력과 인생을 판가름할 마지막 질문이었다.


김대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노트북 가방에서 두툼한 바인더 세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묵직한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이것이 제 대답입니다.”


그는 바인더를 펼쳤다. 그 안에는 지난 10년간의 선양그룹 사업보고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모든 언론 기사, 경쟁사 분석 자료, 관련 논문까지... 세상에 공개된 모든 자료들이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페이지마다 그의 손글씨로 쓴 분석과 형광펜 표시가 가득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노력의 결정체였다.


“저는 특별한 정보원이 없습니다. 다만, 고객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영업사원에게는, 세상에 공개된 모든 정보가 최고의 ‘내부 정보’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저는 지난 2주간, 선양그룹의 직원이라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선양그룹의 미래를 고민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이 자료들은 그 시간의 증거입니다.”


임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경이로운 눈으로, 한 청년이 쌓아 올린 집요함의 성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인맥이나 꼼수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성실함과 노력의 증명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긴 복도. 김대리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모든 것을 쏟아낸 그의 영혼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앞서 걷던 박팀장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김대리를 칭찬하지도, 결과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김대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물었다.


“김대리.”

“...네, 팀장님.”

“너...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것은 질책이 아니었다. 경계도 아니었다.

자신의 이해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를 목격한 자의, 순수한 경외와 당혹감이 섞인 질문이었다.

그 순간 김대리는 깨달았다.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인맥 콜렉터’가 아님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괴물이 자신의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