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 숫자에 투영된 우리의 갈망
1
정상의 자리는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된다는 것은 욕망을 품은 이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2
연인을 상징하는 이 숫자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더욱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둘이 함께 걷는 모습은 고독한 이들에게 따스한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3
둘이 만나 셋이 되는 기적. 이 경이로운 변화는 부모가 된 이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감동이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것도 기적이지만, 부모가 되는 일은 그보다 더 무겁고 숭고한 책임이다. 그렇기에 이 숫자는 더욱 소중한 갈망의 대상이 된다.
4
외동을 키우는 부모들은 종종 형제자매의 정을 그리워한다. 다정히 속삭이는 자매, 시끌벅적하지만 든든한 형제,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매력을 지닌 남매. 네 식구가 손을 맞잡고 걷는 풍경은 완벽한 가족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5
독수리 오형제의 향수일까. 5는 묘하게 완전함을 상징한다. 음양오행, 오감, 오장육부, 오대양. 동양 철학에서 5는 조화와 균형을 의미하는 신비로운 숫자다.
6
현대의 질투는 '육각형'에 집중된다.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형을 우리는 육각형이라 부르며 선망한다.
7
일주일의 완성, 무지개의 색깔, 세계 7대 불가사의. 서구 문화에서 행운의 숫자로 통하는 7은 신비와 완전함의 상징이다.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이 숫자는 영적인 충만함을 갈망하는 이들의 부러움을 산다.
8
중국에서는 부를 상징하는 '파(發)'와 발음이 유사해 행운의 숫자로 여겨진다. 팔방미인, 팔등신처럼 우리말에서도 8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쓰인다.
9
야구의 주전 선수, 구척장신의 거인. 9는 완성 직전의 긴장감과 거대함의 극치를 상징한다.
질투라는 거울에 비친 욕망
모든 숫자는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있다.
상황과 시선에 따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그저 무심한 기호로 남기도 한다.
멜 로빈스는 『렛뎀(Let Them)』에서 "질투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타인이 소유했을 때 느끼는 결핍의 감정. 애초에 욕망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투의 시작점은 언제나 '나의 욕망'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공부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닥치는 대로 노력해서 그들을 넘어서려 했다. 한 명을 넘어서면 또 다른 대상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내가 다른 이들의 질투를 받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나에게 질투는 '성장의 연료'였던 셈이다.
질투의 칼날이 향해야 할 곳
"나보다 행복해 보여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초라한데 저 사람은 너무 완벽해 보였다."
흉악 범죄의 동기로 등장하는 이런 진술들은 질투가 얼마나 위험한 감정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질투의 불씨는 외부에서 시작되지만, 그 칼날이 향해야 할 곳은 타인이 아니다.
진정한 적은 내 안의 게으름, 이기심, 무기력, 무계획성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원하는 성취를 향해 나아갈 때, 질투는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괴롭히던 질투의 대상은 사라지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품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질투는 욕망의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것은 남이 아닌,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