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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는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

by 공감디렉터J


초등학교 5학년 겨울, 운동장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 펑펑 쏟아지는 눈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의 시작점을 찾아 달리던 순간, 갑자기 번쩍- 그리고 쿵.

딱딱한 운동장이 내 뒤통수를 강타했다. 입안에는 철맛이 번졌다.

나는 하늘을, 누군가는 땅을 보며 달렸고, 우리는 정면충돌했다.


"야, 입에서 피 나!"


손으로 더듬어보니 입술이 크게 찢어져 있었다. 그렇게 나의 2달간 '강제 침묵 모드'가 시작됐다.


듣는 사람이 되어보니

재잘재잘 수다쟁이였던 내가 갑자기 '묵언 수행자'가 되자,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관찰자가 됐다.


'쟤가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나?'

'목소리가 저렇게 굵었던가?'

'아, 쟤는 불안할 때 말끝을 올리는구나.'


친구들의 말투, 표정, 몸짓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 주변에 친구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처음엔 '아픈 애를 도와주는 착한 어린이' 이미지를 위한 것이려니 했는데, 입술이 다 나은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경청의 마법'을 체험한 것이다. 재미없는 농담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지루한 자랑에도 눈을 맞춰주는 친구. 그런 존재가 친구들에겐 얼마나 소중했을까?


김령아 작가와의 만남

최근 『그 사람은 말을 참 예쁘게 하더라』의 저자 김령아 작가를 만났다.

봄꽃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공감이 중요해요. 그런데 공감하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경청을 해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고, 바로 거기서부터 공감이 시작돼요."


순간, 어린 시절의 그 '강제 침묵'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 올리고 싶은 스토리, 받고 싶은 '좋아요'.

SNS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내 이야기 들어주기'에만 목매고 있는가.


말의 온도를 높이는 법

경청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가 개발한 '인간중심 상담기법'의 핵심도 바로 '적극적 경청(Active Listening)'이다. 상대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에서 '경청하는 리더'를 둔 팀의 생산성이 25% 더 높다고 한다. 경청은 곧 전략이다.


예를 들어보자.

Before:

"첨부 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일정이 빠듯하니 빠른 회신 바랍니다."


After:

"바쁘신 중에 죄송합니다. 첨부드린 기획안을 시간 되실 때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정이 촉박한 상황이라, 가능하시다면 조금 일찍 피드백 주시면 후속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단 두 문장의 차이지만, 받는 사람의 기분은 180도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말의 온도'다.


친절함이라는 최강의 무기

친절한 말씨나 예쁘고 고운 말투는 결코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이 상황을 잘 모면하기 위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김령아 작가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것은 영업과도 같아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가장 스마트한 전략이니까요."


MZ세대가 주목하는 '쿨한 친절함'이 바로 이것이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커뮤니케이션.

초등학교 5학년 겨울, 찢어진 입술이 가르쳐준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말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것, 그리고 진짜 소통은 입이 아닌 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누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누가 불안해하는지, 누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의 온도를 찾아 건넨다.

왜냐하면 알고 있으니까. 친절한 말 한마디가 만드는 기적을, 그리고 그 기적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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